ADVERTISEMENT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놀이의 공간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상의 소설 『날개』를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소설에는 알다시피 이렇다할 사건도, 이야기의 줄거리도 없읍니다. 단지 두개의 공간이 대치되어 있을 뿐이지요. 장지문으로 갈라진 두개의 방이, 말하자면 볕이 안 드는 「나」의 방과 볕이 잘 드는 「아내」의 방이 있읍니다.
이렇게 이질적인 성격의 방이 나란히 한집에 공존하고 있는 것만으로 하나의 갈등을 포함하고 있읍니다.
이상이 발견한 것은 놀이의 공간과 일의 공간 사이에 가로놓여서 전개되어 가고 있는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 「나」 가장을 자든가 그렇지 않으면 번둥번둥 놀고만 있던 자기의 방에서 장지문 저편 쪽의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소설의 발단부분의 갈등은 시작됩니다.
「나」가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면 그 순간부터 일의 공간은 놀이의 공간으로 바뀌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아내」에게는 가장 중요한 생활용품인 화장도구들이 「나」에게 있어서는 장난감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아내의 간판인 얼굴을 비추는 거울은 나에게서는 단순히 태양광선을 반사하여 종이를 태우며 노는 놀이의 도구로 변하여 버립니다.
아내의 경대에 놓인 온갖 화장품과 향수병들도 나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냄새나 맡고 딩구는 관능적인 놀이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내가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단지 화장도구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기 위한 것 뿐만은 아닙니다. 이 소설에서 아내는 창녀와 같은 직업을 가진 여인으로 그려져 있읍니다. 따라서 화장도구는 그녀에게 있어서 화장품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의 방, 그 햇볕이 잘 드는 방은 모든 아름다움과 관능적·쾌락, 그리고 시간까지도 돈으로 환산되는 일의 공간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람까지도 놀이가 아니라 돈벌이의 수단이 되는 작업장이 되는 거지요. 잠이나 자고 번둥번둥 놀면서 시간을 보내는 「나」의 방과는 정반대의 장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가 「아내」의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의 공간을 메리고라운드와 같은 놀이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가 장지문을 열면서 「아내」의 방안에 발을 들여놓는 행위는 하나의 선전포고며 처참한 싸움이기도 한 것입니다.
놀이를 일로 만들어버리는 「아내」와 거꾸로 일용놀이로 만들어버리는 「나」.
그것은 창녀로서의 아내와 게으름뱅이로서의 나로 상징되는 인간의 두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일을 만들어 가는 아내의 방에서 최대의 가치를 지니는 돈까지도 내게는 놀이의 대상이 됩니다. 「나」에게 있어 은화는 딱딱하고 싸늘한게 손끝에 와 닿는 감각적인 쾌락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 것,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 모두 일종의 쾌감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나」는 돈을 남에게 주는 그 놀이를 해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 새 놀이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방밖으로 나온 「나」는 도시의 어느 구석에서도 마땅한 놀이의 공간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야맹증의 눈을 가지고 밤의 서울거리를 놀이의 공간을 찾아 헤매 다니는 나의 노력은 결국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뿐 아니라 그 행위는 아내의 일을 방해하게 됩니다. 「나」의 외출을 자신의 일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간주한 아내는 「나」에게 아달린을 먹여 잠을 재워 버립니다. 일의 공간이 놀이의 공간을 거세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날개』는 일의 공간밖에 남아있지 않은 현대문명 속에서 놀이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자의 몸부림이며 절규입니다. 모든 것이 기능성과 실용성에 의하여 재단되는 현대문명 속에는 공지가 없읍니다. 놀이에 대한 흥미밖에 없는 「나」의 존재가 발붙일 구석이 없는 것입니다.
이상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공지를 찾아 헤매 다니다가 황량한 버려진 땅을 찾아내고 좋아하는 이야기를 쓴 일이 있읍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곧 절망으로 바뀝니다. 그 공지 한쪽에 『××회사 건축부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날개』는 비실용적인 놀이의 공간을 탐색하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현대문명에의 도전이고 실용주의와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싸움에는 승산이 없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살고있는 그 공간들은 궁극적으로는 장지문으로 인하여 일의 공간과 놀이의 공간으로 양분된 『날개』속의 공간과 같은 것입니다. 「아내」의 방이 내용(일)으로 가득 차서 할 수 없이 거리로 쫓겨나는 소설 속의「나」처럼 우리도 모두 놀이의 공간에서 내쫓기고 있읍니다.
그리고 거리에서도 놀이의 공간을 찾아내지 못한 「나」처림 우리도 그 놀이의 공간을 확보하는 일에 실패해 가고 있읍니다. 일의 공간을 놀이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려한 이상의 시도는 어른들의 공간을 어린이의 공간으로 환원시키려한 하나의 몸부림이었읍니다.
놀이의 공간은 어린이들의 공간이며, 원초적인 상태에서 인간이 지녔던 정신적 여유의 공간입니다. 따라서 그의 실패는 현대인의 공통적인 좌절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