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한국어로 일본 전통 1인극 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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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일본 고유의 무대 예술 가운데 라쿠고(落語)라 불리는 1인극이 있다. 방석에 정좌한 배우가 다양한 목소리로 연기하고 변화무쌍한 표정으로 관객과 교감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내용은 코미디적 요소가 짙지만, 관객에게 단순히 웃음 만을 선사하기 보다는 이솝 우화처럼 교훈이나 여운을 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원맨 쇼나 만담과 구별된다. 그런 라쿠고 무대에 재일동포 3세가 뛰어 들었다. 더구나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라쿠고를 연기해 일본 언론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쇼후쿠테이 긴페이(笑福亭銀甁)라는 예명의 심종일(37)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무대나 방송에서 자신이 재일동포임을 당당하게 밝힌다.

그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라쿠고계에 입문했다. "어린 시절부터 남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흥미가 있었다"며 큰 망설임없이 이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원래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고교 진학 무렵 일찌감치 포기했다. 일본 3대 라쿠고 명문으로 꼽히는 쇼후쿠테이 문하에 들어간 지 올해로 17년. 그는 고베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방에서 젊은 라쿠고 연기자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한국어로 라쿠고를 시도한 것은 지난해 여름부터다. 양석일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를 보고 나서다. 자신의 할아버지와 같은 재일동포 1세들의 잡초같은 삶이 그려진 이 영화를 통해 "내 몸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피를 느꼈다"고 말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또 한번의 고민을 통해 내린 결론은 '그래, 한국어로 라쿠고를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그는 재일동포 친구에게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한글을 겨우 읽는 정도이던 실력이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늘었다. 그는 지난 2월 오사카에서 재일동포 학생들을 관객으로 앉혀 놓고 한국어로 라쿠고 '동물원'을 공연하던 감격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재일동포 장학재단이 주최하는 한 수련회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일본식 이름을 쓰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더군요. 그 이후로 마음 한구석에선 뭔가 자괴감 같은 것이 남아 있었어요. 한국어 공연을 통해 그런 느낌을 말끔히 씻을 수 있었죠."

심씨는 다음달 23일 서울 동덕여대 국제회의실에서 펼쳐질 첫 한국 공연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라쿠고로 공연한다는 '꿈'도 키우고 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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