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방으로 거듭난 할머니의 '아름다운 유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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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대 할머니가 세상을 뜨기 전 기증한 15평짜리 아파트가 불우 이웃을 위한 무료 빨래방으로 개조됐다. 자원봉사자들이 독거노인 등에게서 수거해 온 빨래를 하고 있다. N-POOL 대전일보=신호철 기자

평생 혼자 살다 세상을 떠난 80대 할머니가 기증한 15평짜리 아파트가 불우 이웃을 위한 마을 빨래방으로 부활했다.

지난해 1월 노환으로 작고한 남소저(당시 85세)씨는 2003년 5월 '내가 세상을 뜨면 살고 있는 아파트(3500만원 상당)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는 내용의 유언장을 대전시 중구 석교동 동사무소에 전달했다. 아파트는 남씨가 떡장수와 과일행상 등을 하며 푼푼이 모은 돈 320만원으로 1986년 구입한 것이다.

그는 생전에 주변 사람에게 "국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특히 동사무소는 나의 보호자나 다름없었다"며 "내 아파트를 동사무소에서 맡아 좋은 일에 썼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충남 논산 출신인 그는 30대 초반에 남편과 사별한 뒤 자식도 없이 사글세방에서 살다 환갑이 다 된 나이에 겨우 집을 장만했다. 20여 년 전부터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지정돼 국가로부터 한 달에 30여만원씩 지원받아 생활했다. 2002년부터는 관절염과 치매로 거동이 불편해 대전의 한 치매센터에서 요양생활을 하다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할머니가 작고한 뒤 동사무소 측은 아파트 활용방안을 두고 고심하다 관내에 국민기초생활수급자 등 저소득층(600여 가구)이 많다는 점에 착안, 이들을 위한 무료 빨래방을 만들기로 했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주민들도 나섰다. 빨래방 내부 시설은 동사무소가 100만원을 들여 개조하고 주민자치위원 10여 명은 십시일반으로 400만원을 모아 세탁기(용량 13kg) 3대와 건조기.다리미 등 세탁장비를 구입했다. 아파트 현관에는 할머니 이름을 따서 '남소저 빨래방'이란 간판을 달았다.

자원봉사를 원하는 주민들도 줄을 이었다. 자원봉사팀은 매주 세 차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빨래방을 운영한다. 보통 하루에 5가구(50여kg)의 빨래를 처리해 준다. 봉사 대상은 석교동 일대에 혼자 사는 노인이나 장애인, 소년.소녀 가장 등 빨래를 직접 하기 힘든 150여 가구 주민이다. 속옷.양말에서부터 이불까지 빨아준다.

이들은 3개 팀으로, 1주일에 하루씩 봉사에 참여한다. 자동차로 직접 가정을 방문해 빨래를 수거한 뒤 세탁이 끝나면 집까지 배달해 준다. 세제와 전기료 등 빨래방 운영비(월 20만원)도 봉사요원 등 주민들이 돈을 걷어 부담하고 있다.

성선숙(52) 자원봉사팀장은 "빨래를 제때 못해 몸에서 냄새까지 나던 노인들이 세탁해 준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며 활짝 웃었다.

빨래 봉사를 계기로 봉사요원들은 노인가정 집안 청소, 이.미용 봉사 등으로 활동을 넓혀가고 있다. 주민들은 또 독지가와 연결해 노점상 등 생활이 어려운 25가구에 매달 5만원씩 지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근 병원을 찾아가 노인 요실금 환자 2명의 무료 수술 승낙을 받기도 했다.

부녀회장 조병분(59)씨는 "빨래 수거 때문에 독거 노인 등의 가정을 방문하다 보면 딱한 사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며 "남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봉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대전=김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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