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국가 표준] 4. 표준 놓치면 시장 잃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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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한국에서 열린 IEC 총회의 모습.

1996년 홍콩. 행정청 대변인은 "공공사업에 입찰하려는 기업은 ISO(국제표준기구) 9000 인증을 따야 한다"고 발표했다.

ISO 9000이란 국제표준기구가 정한 품질관리 표준이다. 이 인증을 딴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는 일정 수준의 품질을 충족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자 일본 건설업체가 발칵 뒤집혔다. 홍콩의 건설시장에서 앞서가던 일본 업체들은 ISO 9000보다 더 엄격한 자체 품질관리시스템을 운영했다. 따라서 일본 건설업체들은 ISO 9000을 딸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러나 홍콩 행정청의 결정으로 일본 건설업체는 ISO 9000 인증을 받을 때까지 홍콩의 공공건설 시장에서 죽을 쑤었다. 표준을 놓쳐 시장을 잃은 것이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0년. 일본 정부.건설업체는 몽골에 고속도로를 깔아줬다. 이는 일본 자동차의 수출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몽골의 고속도로를 일본의 표준으로 닦으면 일본 자동차의 수출도 그만큼 쉬워진다는 계산이었다. 예상대로 일본 차의 몽골 진출은 계속 늘고 있다.

표준을 선점해야 시장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가 활짝 열렸다. 정부가 앞장서 자국의 표준을 세계 표준으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국제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장과 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는 표준과의 전쟁이 한창이지만 한국은 걸음마 수준이다.

◆ 정부가 앞장서 표준 선점=ISO와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를 주도하는 곳은 유럽이다. 그런데 92년 일본이 자동차 엔진, 인공 관절 등에 사용되는 파인 세라믹의 일본 기술을 국제표준으로 만들려고 ISO에 관련 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했다. 당시 일본의 기술력은 최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독일.영국은 일본의 제안을 힘으로 막았다.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시장을 일본에 내주지 않기 위해서다.

국내 표준에 안주하다 거듭 쓴잔을 마신 일본은 결국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00년 이후 정부 차원에서 86억원을 투입해 기계.물류 등 11개 일본 기술을 국제 표준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일본 기술이 세계로 퍼져 11개 분야에서 올린 경제 효과가 8조2000억원이라고 일본 정부는 분석했다.

민간 중심으로 표준을 정했던 미국도 점차 정부가 나서 민.관 연대로 국제표준화 활동을 적극 펴고 있다. 96년 미 정부는 '국가기술 이전 및 진흥법'을 제정하고 ISO.IEC 간사 진출과 세계표준 제안 활동을 대대적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 현 ISO.IEC 간사 중 미국인이 166명으로 가장 많다.

미국은 민.관 전문가의 해외 파견을 통해 미국 표준을 세계표준으로 채택하는 전략도 쓴다. 멕시코 정부가 2000년에 수도 계량기를 새로운 표준 규격으로 바꿀 계획을 세우자 미국 민.관 전문가들이 대거 멕시코로 날아가 미국 표준을 멕시코 표준으로 채택하도록 했다. 이후 멕시코 계량기 시장의 절반을 미국산이 차지했다.

중국이 2002년 5월부터 중국에서 판매.수입되는 제품에 정부의 강제인증제(CCC) 마크를 부착하도록 의무화한 것도 엄청난 내수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 걸음마 수준의 한국=국제표준을 정할 때 국제표준기구 산하 위원회의 책임자인 간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간사는 표준 관련 회의를 주재하고 표준 제정.운영 등의 실무를 맡는다. 이 때문에 간사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에 따라 어떤 기술이 표준으로 채택될지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현재 ISO와 IEC의 간사 수는 모두 912명. 이 중 한국인 간사는 12명이다. 독일 140명, 영국 113명 등과 비교가 안 된다.

일본도 92년 20명이었던 간사가 지난해 말까지 58명으로 늘었다. 일본 정부는 간사 진출을 위해 예산과 통역 등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반면 한국인 간사는 대부분 개인의 노력으로 임명됐다. 우리 정부가 간사에게 지원하는 것은 국제회의 경비와 월 50만원이 전부다.

그나마 올해 5억원이었던 간사들에 대한 지원 예산이 내년에는 3억6000만원으로 깎인다. 이러니 ISO 규격 2만여 건 중 순수 우리 기술이 반영된 것은 51건에 불과하다. 그나마 대부분이 동영상압축기술(MPEG) 분야다.

표준협회 박영환 본부장은 "범정부 차원에서 표준정책에 대한 중장기 청사진을 만들어 21세기 표준경쟁에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애는 쓰지만 …
국제 기구 분담금 규모는 세계 10위권
표준 결정하는 간사는 912명 중 12명

국제표준기구(ISO)와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같은 표준기구에서 한국의 위상은 낮은 편이 아니다. 한국은 1963년에 각각 두 기구에 가입했다. ISO가 47년에 생겼고, IEC가 1906년에 출범한 것을 감안해도 정부 차원의 표준기구 가입이 늦은 것은 아니다. 미국.영국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서는 늦었지만 웬만한 중진국보다는 이른 편이다.

한국은 두 국제표준기구에 분담금도 꽤 낸다. 올해에만 ISO에 3억9000만원, IEC에 1억7000만원을 낸다. 세계 10위권 규모의 분담금이다.

표준기구에서 실질적으로 업무를 담당하는 기술위원회(280개) 중 현재 213개(정회원)에 가입돼 있다. 가입률이 72.5%로 세계 7위권이다. 가입률은 2000년만 해도 37.8%에 그쳤으나 4년 만에 배 가까이 올랐다.

국제 표준화 회의에도 열심히 참석한다. 지난해 총 568회의 회의에 3700명이 참석했다. 지난해 IEC 총회를 한국에서 열기도 했다. 한국이 국제표준 무대에 적극적으로 나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국제표준기구 위원회 간사 진출은 미약하다. 그나마 지금 간사가 된 12명 중 11명이 2000년대 들어 선출됐다. 세계 표준무대에서 열심히 뛰고는 있지만 실속은 없는 셈이다.

올해 방재 및 소화장비 기술위원회 간사로 선출된 호서대 박용환 교수는 "지금까지는 개인이 뛰어 간사를 맡았지만 앞으로는 정부와 민간기업.협회 등이 연계해 한국의 인재가 국제 간사로 진출하도록 지원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일본은 표준회의를 하면 수십 명의 민.관 합동 대표단을 파견하고 통역만 2명 이상이 따라온다. 중국도 10명 이상의 대표단이 참가해 자국 대표를 간사로 만드는 데 열성적이다.

진화하는 국제표준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표준화 나서

국제표준도 진화한다. 대표적인 게 1990년 이후 등장한 ISO 9000(품질경영시스템), ISO 14000(환경경영시스템) 등 시스템 표준이다.

종전의 표준은 주로 제품의 구조.성능.시험 방법 및 용어 등을 규정했다. 반면 시스템 표준은 작업장 안전 관리, 직원 교육 등 각종 절차를 인증하는 표준으로 발전한 것이다.

ISO 9000은 영국이 일본의 품질관리시스템을 전수받아 국가표준으로 채택했고, 87년 영국 주도로 국제표준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품질을 관리하기 위한 각종 절차와 방법 등을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발전한 것이 ISO 14000이다. 환경을 고려한 친환경적인 경영을 하기 위한 각종 절차 등을 규정했다.

최근에는 IS0 26000(사회적 책임 경영시스템)도 논의되고 있다. 국제표준기구 주도로 2008년까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규정을 표준화할 예정이다.

기업 활동에 요구되는 윤리.환경.사회공헌 등의 가치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만들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경쟁력으로 발전시키자는 뜻이다.

만약 기업이 노사관계.사회공헌.소유경영구조 개선 등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국제 입찰 등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최근의 두산그룹처럼 소유주끼리 경영 분란이 생기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돼 국제입찰이나 수출에 불이익을 받게 된다.

사회적 책임 표준화 포럼 김영호 회장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 반기업 정서도 줄고,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라며 "국내 기업도 ISO 26000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정경민.김종윤.허귀식.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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