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파일] 우울증 앓는 로봇…코믹 SF의 상상력? 상상 그 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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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SF영화라면 모름지기 최첨단 무기나 인간 뺨치는 최신 로봇이 나오게 마련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6일 개봉.서울 필름포럼1관.사진)라는 묘한 제목의 SF도 예외는 아닌데, 이 로봇 참 희한하다. 머리가 큰 만큼 잡생각도 많아서 하필이면 인간의 특성 중 자신감 결핍증.의욕상실증.만성우울증을 빼닮았다. 이 로봇의 가공할 위력을 짐작하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런 증세를 전염병처럼 퍼뜨릴 수만 있다면, 어떤 무지막지한 전투부대라도 단번에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주인공들이 목숨 걸고 구하려는 최첨단 무기 역시 기발하다. 광선에 맞으면 쏜 사람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게 되는 광선총이다. 플레이보이가 쏜 총에 맞으면 요조숙녀도 속칭'껄떡쇠'같은 발언을 하는 식이다. 이 총이 개발된 이유가 더 가관이다. 부인들의 말귀를 도통 못 알아듣는 남편들 때문에 발명됐다나.

이쯤에서 짐작하듯, 이 코믹SF의 상상력은 통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다. 고속도로 건설로 집이 철거될 위기를 걱정하다 우주 고속도로 건설로 지구 전체가 '철거'될 위기를 맞는 시작부터 황당하기 짝이 없다. 상영시작 10여 분 만에 지구를 폭파하는 줄거리 못지않게 주인공들의 탈출법도 대담하다. 영화제목처럼 히치하이킹, 즉 엄지손가락을 들고 아무 우주선이나 얻어타는 것이다. 젊은 시절 유럽 각지를 배낭 여행했던 원작자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 이런 설정에서 보듯, 현실을 비트는 동시에 무제한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다.

영화 초반의 영국식 유머 가운데는 '우주 최악의 고문'이 포로에게 자작시를 읊어주는 것이라는 식의 소화가 쉽지 않은 대목도 있다. 하지만 이런 유머감각이 지독한 관료주의나 TV 중독증을 풍자하는 대목에 이르면 지구인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영국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원작은 1970년대 말 영국에서 라디오드라마로 출발해 이후 TV드라마.소설.연극 등으로 두루 만들어질 만큼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도 전5권으로 출간된 소설은 SF매니어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말로만 전하자니 언뜻 비주류 취향 같지만 실은 할리우드 대형제작사가 만들어 올 봄 미국 개봉에서 당당히 첫주 흥행수입 1위를 차지했다. 우주의 깊이와 지구의 비밀을 한눈에 보여주는 영화 후반부의 장면들은 '스타워즈'시리즈와는 또 다른 볼거리를 선물한다. SF매니어 박상준(서울SF아카이브 대표)씨는 "활자로만 상상하던 이미지를 눈으로 보는 재미가 대단하다"고 평했다. 국내 배급사는 개봉할 생각을 못하다 눈밝은 극장주의 제안으로 단관 개봉을 결정했다. 과학적인 추론 따위는 거들떠도 안 보는 대신 SF라는 장르가 온갖 상상력을 담아내기에 얼마나 큰 그릇인지 실감하게 해주는 영화다. 우주는 넓고, 상상할 것은 참 많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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