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⑥남북관계] 57. 북한판 엑소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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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철씨 일가 11명이 1987년 2월 8일(1월 11일 탈북) 일본·대만을 거쳐 입국했다. 김씨가 귀국 기자회견에서 한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왔다”는 말은 한동안 유행어가 됐다(위). 97년 4월 20일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와 측근인 김덕홍씨가 서울공항에 도착해 만세를 부르고 있다(아래).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왔다.”

1987년 1월 15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일가족 11명과 함께 배를 타고 북한을 탈출한 김만철씨. 기관 고장으로 4일간 표류하다 일본 경비정에 의해 구조된 그가 조사과정에서 던진 이 한마디는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북한 경제가 나빠지고 있다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일가족이 무작정 삶의 터전을 떠나야만 했을까.

김씨 탈북 후 수년이 지나자 통치자가 ‘지상낙원’이라고 부르던 북한은 계획경제의 모순과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가 겹치면서 폐허의 땅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90년부터 9년간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주민의 삶을 국가가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장 기본적인 식량문제조차 해결할 수 없게 됐다. 수십만 명의 아사자가 생기고 ‘꽃제비’가 넘실거렸다. 이런 상황은 북한 주민들을 탈북 대열로 몰아넣었다. 김씨의 탈북은 ‘북한판 엑소더스’의 예고편이었던 것이다.

96년 김경호씨 일가족 17명이 야밤에 두만강을 건넌 후 중국대륙을 종주한 끝에 39일 만에 홍콩에 도착했다. 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식량난의 여파였다. 이 때부터 북·중 국경을 넘는 북한 사람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내 탈북자는 7만5000-12만5000명으로 추정됐다. 중국정부의 박해가 심하자 중국에 있는 외국 공관에 들어가는 망명 방법도 등장했다. 한국으로 오는 탈북자 수도 99년을 기점으로 급증했다. 지난해엔 무려 1894명이었다.

97년엔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과정을 거쳐 황장엽 당시 노동당 비서가 서울에 왔다. 북한 통치의 핵인 ‘주체사상’형성에 깊숙이 관여하고 권력서열 20위 내에 드는 거물급이었다. 당시 북한은 ‘배신자여, 갈테면 가라’는 식으로 반발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탈북 행렬이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이루어진 그의 탈북은 북한체제의 쇠약성을 여지없이 보여준 것만은 분명하다.

탈북 유형과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대접도 달라졌다. 특히 먼저 탈북한 사람이나 비정부기구(NGO)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기획 탈북’이 늘었다. 하지만 기획 탈북의 일부에는 ‘탈북 브로커’도 끼여 있다.

대량탈북과 체제 경쟁의 사실상 종료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던 ‘기자회견’과 ‘두둑한 정착금’은 사라졌다. 오히려 무관심, 심지어는 냉대하는 분위기가 깊어만 가고 있다. 향후 커다란 사회문제를 제기할 게 확실해 미리미리 만반의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요구된다.

고수석 기자

공산권 붕괴와 거듭된 재해로 북한 경제 침몰

▶ 북한 식량난이 극도에 달했던 1990년대 후반 북한 중부지역의 한 농민시장에서 굶주린 어린아이가 맨발로 땅에 떨어진 음식찌꺼기를 줍고 있다.

북한의 경제가 이 지경이 된 데는 대내외적 원인이 겹쳤기 때문이다. 대내적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비효율성이 누적됐고,대외적으로 공산권의 붕괴가 결정적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 침체 현상은 나타났지만 사회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내우외환(內憂外患)은 어쩔 수 없었다.게다가 자연재해마저 겹쳐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식량난이 몇년째 계속되면서 결국 식량 대용으로 삼았던 나무껍질· 풀· 나무뿌리마저 다 바닥이 나버렸다. 굶어죽을 바에야 죽더라도 탈북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 경제는 원자재와 기계·설비·부품 등 자본재의 상당부분을 수입에 의존해 왔다. 공산권의 붕괴로 원유 등 핵심 원자재와 자본재 수입이 어려워지자, 국내 생산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북한의 무역규모는 소련이 해체된 91년 전년 대비 40% 이상 격감했고, 소련으로부터 제공되던 경제원조도 사라졌다.

석유·석탄·전력의 공급에 차질을 빚자 공장가동률은 급락했다. 파급효과는 다른 산업으로 전파됐다. 특히 농업부문에서 석유와 부품의 부족으로 비료 생산에 차질이 생겨 곡물 수확량이 크게 줄었다. 곡물 생산이 감소해 배급량도 줄었고,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노동자의 생산성도 떨어졌다. 따라서 광업과 제조업 분야의 생산량이 줄어드는 악순환이 지속된 것이다.

북한은 원자재·자본재의 부족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남북 경협 확대와 일본으로부터의 보상금 확보를 통해 돌파구를 모색했다.하지만 92년부터 불거진 핵개발 의혹은 또 다시 악재(惡材)로 작용했다. 비록 94년 제네바 합의로 북한이 경제적 실리를 챙겼다지만 협상 과정에서 증폭된 북한에 대한 불신은 제네바 합의 이행과 대외관계 개선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고수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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