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회고록 국내중점연재 「신의를 지키며」…<26>캠프데이비드 그후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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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협상대표단이 귀국한 뒤 나는 「사다트」와 「베긴」에게 친서를 보내 우리가 주장했던 평화조약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베긴」은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촌을 더 확장하고 그의 사무실을 동 예루살렘으로 옮길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평화노력을 해치는 행동을 삼가 줄 것을 촉구하는 나의 친서에 대한 그같은 응답에 대해 「베긴」은 국내 정치인들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왔다.
「밴스」가 중동평화협상작업을 계속해 나갔지만 결과는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었다. 이스라엘과의 협상은 특히 어려웠다.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다얀」이 맡고 있다가 「바이츠만」에게 떠넘기고 「바이츠만」은 각의에, 각의는 「베긴」에게, 그는 다시 되돌리고 하는 식으로 공 돌리듯 줄곧 책임을 떠넘겼다.
나는 「베긴」이 캠프데이비드협정으로 그 자신의 집권당 안에서 반대파로부터 정치적으로 곤욕을 당하고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사다트」 또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다른 아랍국가들로부터 이스라엘과의 개별적인 평화협정을 하지 말라는 강력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협상은 뒷걸음질 치고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사이」(밴스 애칭)에게 이번 주말에 협상을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이제는 이 문제를 실무 외교관들에게 맡겨 미국이 이 비생산적인 노력에 얼마나 전력투구해왔는가를 이스라엘과 이집트 지도자들이 깨닫도록 해야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별도의 조약 체결을 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영구히 점령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착촌(요르단강 서안)과 동 예루살렘문제를,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인의 개입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삼고 있다. <일기 l978년 11월 8일>
나는 좌절감 속에서도 중동평화노력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두 나라지도자들에게 양국간의 견해차이가 평화조약체결로 양국이 얻을 이익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나는 두 지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같은 노력에 대한 가일층 새로운 지원을 촉구했다. 「사다트」는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유로운 의회선거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시나이로부터의 이스라엘 철수를 연기시킬 용의가 있다고 제의했다. 그는 나에게 우리의 공동노력을 포기하지 말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베긴」은 조금의 유연성도 보이지 않은 채 이스라엘의 기본입장이 변질됐다는 우리의 불평을 수긍하지 앓았다. 내가 그에게 수상 자신의 견해를 따져 물었을 때도 「베긴」은 늘상 자신은 행정부의 일개 각료에 지나지 않으며 투표권도 l장밖에 갖고있지 않다고 둘러댔다.
오히려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할리드」국왕과 「파하드」황태자가 메시지를 보내 사우디아라비아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대한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지지의 뜻을 비쳤다.
아랍대표들이 바그다드에서 만났을 때 사우디아라비아는 그러나 큰 압력에 못 이겨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비난하는 대열에 합세했다. 그들은 온건파세력이 없었더라면 회의분위기가 훨씬 더 험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사람들이 전에 나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데 대해 당혹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후세인」 요르단 왕이 강경파의 대변인이 되었음을 알고는 우리는 분노를 느꼈다.
「사다트」와 「베긴」은 계속해서 국내외적으로 큰 압력을 받고있었다.
「베긴」수상은 극우파로부터 물리적인 공격도 받았는데 당 대회에 가는 도중 달걀과 토마토 세례를 받았는가하면 한 과격파는 승용차 위에 올라 앞 유리창을 깨뜨리기도 했다.
「사다트」와 전화통화를 해보니 바그다드회의에서의 사우디아라비아의 강경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계속 대화를 갖고 그들로부터 용기를 얻고 있었다.
11월 16일 이집트의 「호스니·무바라크」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 이집트의 제안을 내놓았다.
제안내용은 평화조약의 체결,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수에즈운하 이용의 허용, 조약체결 1개월 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대한 협상개시, 최소한 가자지구에 대한 협상 성공시 이스라엘군의 시나이반도로부터의 부분철수, 평화조약체결 2개월 후 양국대사교환, 그리고 2∼3년 후 시나이반도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완전철수 등이었다.
「무바라크」의 인상은 매우 좋았다.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고 솔직했다. 「사다트」보다 더 완고했고 국제문제에 일반적으로 높은 식견을 갖고있었다. 「사다트」는 내가 「먼데일」부통령을 신임하듯 「무바라크」를 신임하고 있었다.
「무바라크」는 이집트가 가능한 한 유연한 태도로 이스라엘과 협상하고 싶지만 요르단강 서안의 장래문제를 제쳐놓고 평화조약을 맺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요르단강 서안에 관한 협상 일정은 이집트에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1월 21일 「베긴」은 나에게 전화로 이스라엘 각의가 1개월 전에 마련된 조약초안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다고 통고했다. 그러나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 협상 일정은 제외됐다고 덧붙었다.
나는 이 같은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밴스」를 중동에 다시 파견했다. 그는 이집트에서는 성공했다는 소식을 보내왔으나 이스라엘에서는 좌절의 소식만 보고했다. 나는 12월13일 「밴스」장관에게 귀국지시를 내렸다. 78년도 점차 저물어가고 있었다. 중공과의 관계개선문제,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등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중동문제만 엉키어가고 있었다. 이란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이 바람직스럽지 못했고 어렵게 얻은 중동 평화협정이 깨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나는 「밴스」장관부부를 캠프데이비드 산장으로 초청해 79년에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을 몇 시간 동안 토의했다. 중동문제가 가장 어려운 과제였고 또 정치적인 부담이 제일 무거웠다.
-우리는 중동문제를 자세히 재검토했다. 그리고는 과감하게 중동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국내정치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문제해결을 지연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일기 l978년 12월 29일>
79변 새해가 밝고 처음 몇 주 동안 우리는 새로 구성된 의회문제와 중공과의 관계정상화, 그리고 이란 「팔레비」왕의 몰락 등으로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특히 「팔레비」의 몰락은 페르시아만의 불안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에 자극된 사우디아라비아나 요르단, 그리고 기타 중동국가들이 평화와 안정을 모색하기 위한 집단적인 노력을 기울일만한데도 그런 움직임은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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