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국가 표준] 3. 민간 표준을 살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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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는 결혼 예물로 변함없이 인기다. 그러나 국내에선 고가의 다이아몬드 값을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이아몬드 감정 기준이 표준화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원마다 값을 다르게 매기는가 하면, 같은 크기라는 다이아몬드 무게가 다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보석학회, 일본에서는 보석감별단체협의회라는 민간단체가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귀금속의 함량과 등급을 매기는 기준을 민간표준으로 정해 놓고 있다. 이를 어긴 업자는 해당 업계에서 퇴출하는 등 엄격한 자율 정화 노력도 뒤따른다. 국내에서도 소비자단체와 귀금속상을 중심으로 민간 표준을 만들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사설 감정원 간의 이해 관계가 엇갈려 표준 제정은 제자리 걸음이다.

민간이 스스로 만드는 '단체표준'은 국가표준의 뿌리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단체표준이 점차 세력을 넓혀 국가표준으로 발전하는 게 통례다. 1만2000건에 이르는 미국의 국가표준은 거의 대부분 민간표준을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단체표준이 국가표준으로 채택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 걸음마 단계 민간표준='똑똑한 아파트' '홈 인텔리전트'. 요즘 건설회사들이 광고하는 카피다. 밖에서 전화로 가정에 있는 가전제품을 켜거나 끄는 것은 물론, TV프로그램 녹화나 난방 온도까지 조절할 수 있는 홈 네트워크 시스템을 말한다. 그러나 이 역시 가전업계 간의 이해가 대립돼 표준 통일은 요원한 실정이다. 예컨대 삼성전자 기준으로 설계된 집에서는 LG.대우전자 제품을 쓸 수 없다는 얘기다.

표준협회 유영길 민간표준팀장은 "홈 네트워크 시스템의 표준이 통일되면 소비자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이는 다시 시장의 성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기업에도 이익이 된다"고 지적한다. 파이를 차지하는 데 급급하기보다는 파이를 키우는 쪽으로 눈을 돌리면 소비자와 기업 모두 혜택을 본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내 단체표준은 지난해 말 4000여 종으로, 16만여 종에 이르는 미국은 물론 4만5000여 종의 일본에도 훨씬 못 미친다. 그나마 쓸모없는 게 부지기수다. 2003년 말 조명공업협동조합은 637건의 단체표준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기술표준원이 지난해 각 단체에 표준을 다시 등록하라고 한 결과 25종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폐기되거나 중복 계산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단체표준의 목록만 보관하고, 실제 규격을 담은 문서를 분실해 단체표준 등록을 하지 못한 협회도 있었다.

◆ 표준이 기업 사활 갈라=1980년대 고화질( HD)TV 기술에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앞섰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NHK가 디지털 방식의 HDTV를 국제표준으로 정하려 하자 유럽 가전업계가 들고 일어났다. 유럽은 86년부터 뒤늦게 아날로그 방식의 기술을 개발해 일본 HDTV 기술의 국제표준 제정을 막아냈다. 이를 두고 유럽에선 '가전시장에서 최초로 유럽 기업이 일본 기업을 물리쳤다'며 떠들썩했다. 이 사건은 일본 기업이 국제표준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아직 국내 기업은 국제표준에 관한 한 '강 건너 불구경'하듯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선 아직 표준만 담당하는 임원을 두고 있는 회사가 없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의 대기업은 표준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임원을 둬 국제회의에 참석하도록 하거나 각종 기술위원회에서 자기 기업의 이익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국내에선 국제회의라도 참석하려 하면 쓸데없는 곳에 시간과 비용을 낭비한다는 핀잔만 듣기 일쑤"라고 토로했다. 기술표준원 유재열 표준정책과장은 "한국 기업은 그동안 남이 만든 규격을 가져다 그대로 만들어 납품했기 때문에 표준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며 "이제 우리 기업도 독자 설계 단계에 온 만큼 표준의 선점이 기업 사활을 가르는 시기가 곧 도래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정경민.김종윤.허귀식.김원배 기자

***외국에선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도 국제표준을 따라가지 못해 세계시장에서 밀려난 쓰라린 경험이 많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 기업들은 국제표준기구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데 소극적이다.

반면 미국.유럽 기업들은 국제기구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예컨대 국제표준화기구(ISO)의 마이크로 오븐을 담당하는 분과위원회 의장은 미국의 가전업체 월풀사 직원이다. 식기세척기 분과의 의장은 독일의 가전업체 밀레사 임원이다. ISO와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의 보안기술 분과위원회 의장은 지멘스의 부사장이 맡고 있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닝 분과위의 의장과 간사는 모두 캐나다 통신회사인 벨 캐나다 소속이다.

반도체와 PDP 분야에서 국제표준을 제안한 경북대 전자전기공학부 박세광 교수는 "국제표준화 작업은 외교와 같아서 기술력 못지 않게 인맥이 중요하다"며 "표준화가 당장 기업의 수익과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좀 더 멀리 보고 표준화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한국의 시장점유율이 늘어나자 일본 기업들에서는 일정한 품질기준을 국제표준으로 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며 "만일 이런 동향을 알지 못하면 우리 기업에 불리한 쪽으로 표준화가 이뤄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충전기 표준화로 시장 더 커져
MP3.디카 등 사용 범위도 늘어

***한국의 성공 사례

2002년 8월 정보통신부가 국내 휴대전화의 충전기를 표준화하기 전까지 소비자는 휴대전화를 바꿀 때마다 충전기까지 몽땅 새 걸로 바꿔야 했다. 휴대전화 회사는 이를 악용해 충전기 값을 바가지 씌우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충전기 표준화 이후 매번 충전기를 바꿔야 하는 불편이 사라진 것은 물론, 충전기 값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휴대전화 충전기 표준화로 소비자만 이익을 봤을까. 그렇지 않다. 휴대전화 살 때 충전기 값이 빠지니 단말기 값이 내려갔고, 이 때문에 시장은 더 커졌다. 여기다 최근에는 휴대전화 충전기를 그대로 쓸 수 있는 MP3와 디지털카메라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휴대전화 충전기는 앞으로도 PDA 등 각종 휴대용 멀티미디어 제품으로 사용 범위가 더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MP3와 디지털카메라 값이 내린 것은 물론이고, 이로 인해 멀티미디어 제품 시장의 성장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머지않아 휴대전화 충전기 잭을 이용해 휴대전화와 MP3, 디지털카메라 간에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기술도 개발될 것으로 보고 있다. 휴대전화 충전기의 표준화가 서로 떨어져 있던 휴대전화와 MP3, 디지털카메라를 하나로 묶는 뜻밖의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내고 있다는 얘기다.

정보통신부 유수근 산업기술팀장은 "휴대전화 충전기 표준화는 미국이나 일본 휴대전화업계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며 "미국.일본 등의 휴대전화 제조회사에서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표준화는 1차적으로 시장을 키우는 효과가 있지만 이것이 계기가 돼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파급 효과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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