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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3)-제79화 육사졸업생들(6)=장창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일본육사 27기에는 입학자중 2명이 탈락되어 김석원장군, 애국지사 이종혁선생, 채병덕장군 (전 참모총장)의 장인인 백홍석장군과 조선총독부 보도담당관으로 있으면서 언론 통제에 악명을 날린 정훈등 20명이 있다. 「가바(포)」종좌로 알려진 정훈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그후 일본에 들어가 살았다.
27기생들은 1915년에 졸업, 현지부대에서 2년간의 하사관 근무를 마치고 소위로 정식 임관된 후 10일씩의 휴가를 받아 고향을 방문했다.
실로 8년만의 환향이었다.
그러나 떠날 때는 당당한 조국 「대한제국」이 있었고 자신들은 그 제국의 희망찬 사관후보생들이었으나 다시 돌아와 보니 조국은 간데 없고 자신들은 조국을 빼앗아간 장본인의 나라의 하급장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라없는 군인의 초라함….
그러나 그후로도 많은 조선청년들이 일본육사에 입학했다. 일본의 정책에 따라 끌려간 사람도 있고 자의로 선택한 사람도 있다. 그 중에서 저명한 분이 많이 나왔다.
몇 분만 들어보면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간 영친왕 이은선생(29기), 지조 있는 군인으로 존경받으면서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이종찬장군 (49기), 6·25때 참모총장이던 채병덕장군(49기), 그리고 김정렬(54기), 유재흥(55기), 이형근 · 장지량 (60기·전 공군참모총장)장군 등이 있다.
일본육사 출신으로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에 남아 복무한 분들 가운데서는 이응준장군과 김석원장군의 활약이 가장 컸다.
이 두분은 대좌(대령)까지 진급되면서 러시아의 10월혁명 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만주사변(1931년), 지나사변(1937년)에도 출정하여 장개석군과 싸워야했다.
이들의 소속부대가 적으로 맞아 싸웠던 러시아의 적군이나 중국군편에는 이청천·이범석·김광서·홍범도·김좌진등의 우리나라 독립군 부대들도 들어 있었으니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응준장군은 주로 지원부대나 고급사령부 요원으로 근무했으나 김석원장군은 직접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큰 용맹을 날려 당시의 신문들에도 크게 보도되곤 했었다.
김장군은 만주사변 때 기관총대장 (대위) 으로 나가 진두지휘로 큰 전과를 올려 7백원의 상금을 받았고, 이듬해는 소좌로 진급까지 했다. 당시 50원이면 한 가구의 한달 도시생활비였다.
김장군이 아껴 키워온 오늘의 성남중·고교는 바로 그 상금으로 시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김장군은 육영사업에 뜻을 두고 학교인가를 신청했으나 조선총독부는 당시 사립학교들이 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되어 왔었기 때문에 신규설립허가는 안해 주고 있었다.
다시 중일전쟁(지나사변)출정명령을 받은 김장군 (당시 용산에 있던 78연대 근무)은 직접 「미나미」 (남차낭) 총독을 찾아가 부탁했다.
『이번에 출전하면 살아서 돌아올 것 같지 않으니 마지막 소원 한가지만 들어 주십시오 .』
『김소좌, 마지막 소원이라니?』
『제가 추진중인 성남학교 인가문제입니다.』
『그것이라면 좋소. 그리고 또 가족에 대해 부탁할 것은 없소?』
『김소좌는 사사로운 부탁은 안합니다.』
우리 나라 창씨개명의 원흉인 「미나미」는 그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그후 김장군은 1개대대로 중국군 1개사단을 무찔렀다는「남원전투의 신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바로 이 전투에 관한 기사가 세상에 크게 보도되어 그후로는 김석원부대가 나타났다하면 중국군이 대결을 피했다고 할 정도다.
8·15후 장개석 장군 (당시 하야중)이 모택동군에 패주하면서 진해에 들러 이승만대통령과 만난 일이 있다. 그 때 이박사가 건군 초기의 지휘관 문제를 걱정했더니 군인 출신인 장개석은 『아니, 한국에는 왜 김석원이라는 군인이 있지 않습니까』하여 이박사를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해방 후 육사8기 특별반을 거쳐 대령으로 임관된 김석원장군은 그 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제의 침략전쟁에 내가 동원된 것이다. 우리 애국지사들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고자 국내외에서 일제와 맞서 고군분투하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판에 나는 그와는 정반대로 일제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동원되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인가. 나는 그 때 기왕 군인이 된 바에야 일본인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생활목표였다. 이것은 짧은 생각이었다.』
이응준장군이나 김석원장군은 일본군에 오래 있었던 만큼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충도 남달리 크고 아팠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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