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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속삭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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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등교하는 초등학생 아이를 따라나서는 아침 산책길은 하루 중 가장 즐겁고 충만한 시간이다. 자기 몸집보다 큰 책가방을 메고 조잘조잘 지껄여 대는 아이들의 모습과 계절을 따라 약속처럼 피고 지는 꽃들이 하나같이 닮아 예쁘다.

그런데 어느 날 교문을 막고 드잡이를 치고 있는 두 아이와 마주쳤다. 집 앞의 초등학교는 고학년 아이들이 교문 앞에서 등교지도를 하는데, 주번 아이가 복장을 단속하던 중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저학년 아이들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고학년 아이들은 불구경만큼 재미있다는 싸움구경에 호기심으로 몰려들었다. 멱살을 잡고 마주 선 자세가 예사롭지 않다. 부드득, 옷의 실밥이 뜯겨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당장이라도 주먹다짐으로 번질 기세다. 내 손을 잡은 아이의 손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가는 순간, 나는 등이라도 떠밀린 듯 달려가 두 아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사내아이들이니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크다. 그래도 지켜보는 아이들 앞에서 주저하고 멈칫거릴 틈이 없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손을 푸는 거다, 알았지?"

나의 다짐에 사납게 눈을 홉뜬 아이들의 눈망울이 흔들린다. 하나, 둘, 셋!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억울한 채로, 분기가 풀리지 않은 채로 구령에 맞춰 스르르 주먹을 푼다. 그들도 두려운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움켜잡은 멱살을 놓지 못하고 더욱 이를 악물어 으르렁대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을 떼어놓고 나니 씩씩거리며 돌아선 아이들보다 내가 더 분하고 억울하다. 한창 분주한 등교시간이었기에 아이들 말고도 싸움을 지켜보는 눈들은 꽤 많았다. 아파트 소로를 지나는 사람들이며 출근을 하는 교사들까지. 그런데 그들은 말다툼이 번져 멱살잡이가 될 때까지 아무도 개입하려 들지 않았다. 폭력적인 상황에 놀라 질린 아이들이 숨죽이고 떠는 동안에도 그들은 냉담한 표정으로 부지런히 자기 갈 길만 갔다. 그들은 부모다. 그들은 교사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어른 노릇을 하려 들지 않았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속담은 까마득한 옛말이 되어 버렸나 보다. 갈등과 충돌이 있는 곳에 누군가 개입하여 중재를 하고 화해를 시도하는 일은 주제넘은 오지랖에 위험한 참견이 되어 버렸다. 나 역시 대단히 이타적이거나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지 않도록 몸을 사려야만 이 각박한 세상을 견뎌나갈 수 있다는 서글픈 처세술에도 익숙하다. 내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는 침묵하며, 내게 필요하다면 행여 손해라도 볼까 목소리를 드높이며. 하지만 그런 날렵한 팔방미인들이 득세하는 사이, 우리 사회는 새된 비명으로 가득하다.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토론하고 합의할 틈이 없다. 공개된 대화는 형식적인 입발림이 되어 버리고 익명의 목소리만 억눌린 분노의 혀를 칼날처럼 휘두른다. '증오 문화'가 개인의 영역을 넘어 집단적인 양상을 띠는 데 대한 우려는 지금껏 우리 사회가 제대로 소통되지 못했음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듣지 않는 상대를 향해서는 악다구니 칠 수밖에 없다. 점점 드높아지는 소음에 익숙해져 가는귀가 먹어간다.

언젠가 유학을 떠났다가 몇 해 만에 귀국한 친구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부를 위해 한국인과의 접촉까지 피해가며 필사적으로 외국어를 익힌 친구였지만,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속삭임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게 그토록 경이로울 수 없더라는 것이다. 모국어와 외국어는 그렇게 다르다. 비밀스러운 속삭임까지도 서로 엿들을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의 관계는 마땅히 그 속삭임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에게만은 속삭임을 가르치고 싶다. 낮게, 조금은 더 부드럽게 소통하기를.

김별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