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그 25몰고 일본 왔던 소 「벨렌코」 중위|기체· 신병 어떻게 처리됐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지난 16일 미그19기를 몰고 온 중공군조종사의 망명귀순사건은 지난 76년 소련의 미그25기를 몰고 일본북해도의 하꼬다떼 공항에 도착, 미국망명을 요구한 「벨렌코」 케이스와 비슷한 점이 많다. 당시「벨렌코」중위(29)는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미국으로 망명했고 미그25기 기체는 해체조사를 받은 뒤 해체된 채로 소련에 반환됐다. 「벨렌코」사건의 처리 경위는 최근의 국제적 선례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점이 많다. 「벨렌코」 사건의 전말과 사건처리과정, 이 사건이 일-소 관계에 미친 영향 등을 알아본다.

<망명경위>
지난 76년9윌6일 하오l시48분 북해도 남단 하꾜다떼(내관) 공항에 소련공군의 「벨렌코」 중위가 조종하는 미그25기 1대가 무단착륙을 감행했다.
「벨렌코」 는 레이다에 나타난 정체불명 비행기를 요격한 일본자위대의 팬텀 2대가 흔적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동안 북해도의 3개 비행장을 돌아다닌 끝에 하꼬다떼 공항에 내린 것이다.
공포2발을 쏘고 비행기에서 내린 「벨렌코」 는 『미국에 망명하려 했으나 도중에 연료가 떨어져 이곳에 착륙했다』 고 미국에 망명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당시 미그25기는 소련의 최신예전투기로 서방세계에 위협을 주는 고도의 성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만 막연히 알려져 있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배일에 가려져 있어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등 서방진영에서는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런 만큼 「벨렌코」의 망명은 국제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일본정부는 상대국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한다는 취지에서 정치적이건 비정치적이건 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다만 제3국으로 망명을 희망하는 경우는 인도적 견지에서 이를 인정해왔고, 이미 14명의 소련 인이 일본을 경유, 미국 등에 망명한 선례가 있었다.
일본정부는 우선「벨렌코」 에 대해 출입국 관리령 위반혐의로 입건하고 그가 타고 온 비행기를 증거물로 조사한다는 국내법에 의한 조치를 취했다.
주일 소련대사관은 이날 하오4시 일본외무성에 대해 ①사실관계를 알려줄 것과 ②삿뽀로(찰황) 주재 소련총영사관직원이 「벨렌코」를 면회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요청해왔다.
일본정부는「벨렌코」 가 미국망명을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보했으나 면회는 사절했다. 본인이 면회를 원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소련 측은 ①삿뽀로 총영사관직원의 면회허용 ○기체에 대한 소련의 불가침권을 지켜줄 것 ③기체를 조속히 인도할 것을 공식 요청함으로써 「벨렌코」 의 망명보다는 미그25기의 비밀유지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일본정부는 당시 「미끼」(삼목무부) 수상주재의 대책회의를 비롯, 대응방안을 놓고 협의를 거듭한 끝에 이날 중으로 본인의 신병과 기체를 분리해서 처리한다는 방침을 굳혔다.
「벨렌코」의 망명은 미국이 망명을 받아들이면 이를 허용하고 기체는 국제관례에 따라 소련에 반환키로 했다. 다만 기체를 불법입국의 증거물로 조사할 필요가 있으면 계속 이를 확보, 조사를 진행키로 했다.
다음날인 7일 북해도 경찰본부는 「벨렌코」 중위에 대해 출입국 관리령, 총도법, 항공법, 형법 222조 (협박죄· 권총발사에 대한 혐의) 위반 등 6개 혐의로 하꼬다떼 경찰에 서류송치 했다. 미그25기에 대해서는 6개 혐의사실에 대한 증거물로 압수했음을 밝혔다.
이와 함께 「벨렌코」 중위의 신병은 지또세(천세) 기지에서 비행기편으로 동경으로 옮겨졌다.
한편 미국정부는 이날 주일미대사관을 통해 「벨렌코」의 망명을 수탁 했음을 통보하고 백악관도 이를 공식 발표했다.
일 검찰청은 7일 하오 10시부터 8일 상오 1시 반까지 이례적인 고위수사관계자회의를 열고 「벨렌코」의 6개 항목에 걸친 혐의 사실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할 것과 출국을 인정할 것, 그리고 기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검증을 계속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벨렌코」 의 망명에 따른 법률적인 장애를 해소시켜 주었다.
「벨렌코」는 9일 하오 7시28분 하네따 (우전) 발 노드웨스트 편으로 일본착륙 4일만에 미국으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소련의 방해공작이 있을 것을 경계해 「벨렌코」를 중절모와 선글래스 차림으로 변장시켰다.
소련대사관측은 출발직전「사도구니코프」 서기관이 7분간 그를 면회, 망명의사를 번복하도록 설득했으나 결의를 굽히지 못했다.

<기체해체조사>
남은 문제는 기체의 처리였다. 소련정부는 이번 사건이 불시착이었다고 강변하면서 일본이 외부세력의 시사나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 말 것과 미그25기의 조속한 반환을 요구하는 성명을 일본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10일 외상· 방위청 장관 등 관계장관회의에서 대책을 협의한 끝에 그때까지 검찰청이 관리하던 미그25기를 방위청 관리로 옮기기로 하고 방위청이 군사적 관점에서 이를 철저히 조사토록 했다. 법률적으로 소유권· 점유권 문제가 제기됐으나 일본당국은 이미 「벨렌코」 중위가 출국하는 날 비행기를 「벨렌코」 에게 반환하고 그가 다시 일본정부에 그 처리를 일임하는 형식을 취해놓고 있었다.
이 같은 절차에 따라 일본정부는 마음대로 미그25기를 조사할 수 있는 그들 나름의 법적 근거를 확보했다.
일본측은 기체해부의 이유로 「일본영토에 불법으로 들어온 타국 비행기는 국제법의 영토 주권상 당연히 그 처리가 일본정부에 전적으로 주어진다」 는 논거를 들었다.
해체작업은 19일부터 하꼬다떼 공장에서 미군 협력 하에 시작됐다.
해체된 기체는 9월25일 성능 및 제원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위해 이바라기(자성)껜 오가와마찌 소재의 항공자위대 거지에 공수돼 10월 중순까지 약 2주일간에 걸쳐 미군의 기술지원 하에 세밀한 성능조사가 행해졌다. 이에 앞서 주일 미군사령관과 일본 자위대의 항공 막료 장간에는 ▲미군은 성능조사기간중 미군의 지휘계통을 벗어나 자위대의 지휘하에 들어간다 ▲취득된 내용은 전적으로 자위대에 속한다 ▲기재 및 인원에 필요한 비용은 자위대가 부담한다는 3가지 항의 외교각서가 교환되었다.
이 조치는 「제3국의 불필요한 개입」이라는 소련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당시 기체해체 및 성능분석에 참가한 미군은 모두 51명으로 기록에 나타나 있다. 해체조사를 진행하면서 일본외무성은 10월2일 소련대사관측에 『미그25기를 10월15일 이후 히따찌 항에서 인도할 용의가 있다』고 통보하고 9일 주일 소련공사가 일 외무성에 『기체반환에 관한 기술적 협의에 응하겠다』 고 통보해 왔다. 이후 몇 차례의 외교접촉을 거쳐 기체는 결국 11월15일「벨렌코」 중위의 망명사건 7O일만에 히따찌 항에서 소련목재운반선편에 인도되었다.

<일· 소 관계악화>
미그25기 사건 발생 후 태평양상에서 소련에 의한 일본어선 나포가 연속적으로 발생, 일본 북해도청은 9월30일 『소련이 주장하는 영해에서의 일본어선에 대한조업을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또 소련 측은 10월19일 일소 수교20주년을 기념하는 정부간 메시지교환에 불응했고 25일에는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당 중앙위에서 미그25기 사건과 관련, 『일소관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극히 어둡게 했다』 고 일본정부의 태도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이 밖에 소련정부는 10월28일 일소 연례합동위원회의 연기를 일방적으로 통고했고 11월2일에는 일본수산청이 당초 예정되었던 「이시코프」 소련어업상의 방일초청을 단념한다는 성명을 내는 등 일소관계는 한동안 악화 일로를 헤맸다. 【신성순 동경 특파원·유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