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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뜨거워진 일본 정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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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올 여름 일본 정치가 흥미롭다. 갑자기 총선거가 실시된다. 일본 정치는 언제나 행동이 늦다. 그런데 마침내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번 국회 해산을 '우정(郵政)해산'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언론 등은 '자폭 테러 해산' '자포자기 해산'이라고 부른다. 발단은 우정 개혁이 좌절된 데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공영(公營)인 우정사업이 정치적 이권의 온상이 됐다고 판단, 오래전부터 민영화를 강력히 주장해 왔다. 특히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북한의 납치문제 해결,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등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한국.중국과의 관계도 나쁜 상황이어서 고이즈미 총리는 우정 개혁을 최후의 업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좌절됐다. 그러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고이즈미 총리는 내각 총리대신의 마지막 수단인 국회 해산 및 중의원 총선거로 도박을 걸었다.

여기에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일본 정치가 시작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중의원의 우정개혁 법안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자민당 의원들을 이번 총선에선 공천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들의 선거구에 유력한 대응 후보를 공천하겠다고 공언했다. 중의원 표결 때 투표하지 않거나 결석한 의원에 대해선 "다음부터는 고이즈미 개혁을 지지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했다. 종래 자민당 정치에선 이런 문제가 생겨도 결국에는 흐지부지돼 잊혀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형 온정주의'가 일절 통용되지 않고 있다. 분위기나 인간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완고한 '고이즈미 정치'다. 비정하다고까지 일컬어지는 그의 완고함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집착하는 태도와 통한다.

이번에 '고이즈미 류(流) 개혁'흐름에서 잘려나가기 시작한 자민당 의원들 가운데는 구태의연한 보수파들이 많다. 고이즈미 총리가 '저항세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금까지도 다양한 기회를 이용해 자민당 최대 파벌인 구(舊)하시모토(橋本)파를 약화시켰다. 또 자신이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 파벌 소속이면서도 모리 전 총리의 말을 계속 무시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우정 개혁 법안이 채택되든 안 되든 일본 정치는 변한다"고 말했다. 채택되면 우정 관련 이권정치가 사라져 구조개혁에 탄력이 붙고, 채택되지 않으면 저항세력을 파괴한다는 뜻이다. 취임시 '자민당을 부수겠다'고 공언했던 고이즈미 총리는 재임 4년여 동안 자민당 정치를 크게 흔들고 있다.

현재 일본 국민의 최대 관심은 우정 민영화가 아니라 연금.사회보장이다. 그런데 일본 국민은 왜 국내정치에 관심을 갖고 고이즈미 지지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고이즈미 총리가 자민당의 낡은 체질을 파괴하면서 스스로 그런 체질과는 무관한 수법을 쓰고 있어서다. 고이즈미 총리는 정치적 기반이 약하지만 국민 지지를 이끌어내는 그의 정치적 후각과 퍼포먼스는 매우 뛰어나다.

일본 국민은 앞으로 당분간 정치쇼를 흥미있게 지켜볼 것이다. 일본 언론도 정국이나 선거 관련 보도만 할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9월까지 일본 국내의 시각은 국내 상황에만 쏠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람직한가. 일본을 둘러싼 국제문제는 모두 교착상태다. 전후 60년인 올해는 한국.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로 끝날지 모른다. 격동하는 국제정세에서 일본의 존재감은 갈수록 희박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간다.

고쿠분 료세이 게이오(慶應)대 동아시아연구소 소장
정리=오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