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도 만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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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러기에 <죽산을 잡으려 했고 그래서 착수했는데 그게 잘 안되니까 도중에 양명산사건으로 잡은 것이다>는 의혹을 깊게한 것이다.
이에 대해 경찰측은 그무렵 북은 간첩을 대량으로 남파했고, 한국의 모든 정당들에 간첩을 침투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죽산에게 걸었던 모든 위법사항은 사실에 근거한 죄상이라고 당시의 취조팀은 증언한다.
진보당사건 관계자를 심문하고 취조한 당시의 서울시경 실무팀의 책임자 K씨(본인의 요청에 따라 이름을 밝히지 않음)가 그 당시의 취조관계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밝힌 사건의 배경에 관한 증언을 옮겨본다.
▲진보당사건을 착수하게된 과정은 이렇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제1서기 「후루시초프」는 <자본주의및 사회주의 두체체가 전쟁없이 평화적으로 상호경쟁하면서 공존할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공산당의 기본전략으로 평화공존론이 채택된 뒤 이북노동당에서도 평화적 남북통일전술을 세웠다.
이럴 즈음 창당된 진보당과 노동당의 주장이 합치돼 진보당원 검거 1년여전부터 진보당에 대해 관심을 두고 추적햇다.
당시 이북노동당의 3대 노선이 ①만국 노동자는 단결하라 ②착취없는 경제정책 ③평화통일 등으로 진보당이 주장하는 ①피해대중은 단결하라 ②수탈없는 경제정책 ③평화통일과 그대로 합치했다.
▲57년10월, 박정호등 간첩단을 검커했다. 북조선공산당 북조선 5로분국 경리부장까지 지낸 박은 53년12월 위장 자수를 한뒤 3년여를 뚜렷한 활동을 하지 않은채 대영목재라는 목재장을 경영했다. 박은 이기붕의장의 자금줄이던 정이식에게 5천만환을 빈것으로 해 북에서 가져온 자금을 혁신세력 규합등 간첩활동에 사용했다. 박은 북에서 가져온 3만달러를 암달러상에게 바꾸다 체포되었다.
박은 이미 경찰의 미행에 의해 죽산의 집에 출입하는 것이 학인했으며 죽산집의 방명록에도 자필로 서명한 것이 있었다. 방명록에 서명을 한다는 것은 만나러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면 쓸리가 없는 것이었다. 박은 취조과정에서 처음에는 <죽산집에 다녀왔다>고 시언하다가 뒤에는 손님이 많아서 못만났다는등 부인하고 죽산도 박과 만난 일이 없다고 했다.
▲조총련 파견 간첩인 정우갑을 계속 미행한 결과 죽산과 신흥사에서 몇차례 만나곤 하는걸 확인했다.
▲죽산의 따님 조호정씨가 여러차례 시장에서 암달러상에게서 달러화를 교환했다. 호정씨도 이 달러는 죽산이 주어서 바꾸었다고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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