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5) 제78화 YWCA 60년(91) 김갑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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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대구YWCA는 59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광주Y와 서울Y 다음으로 오래된 지방Y다. 대구Y는 그 지방사람이 창설했다기 보다 연합회회장 황에스더씨와 김활난씨에 의해 순회 창설된 곳이다.
대구Y가 제일 처음 사업으로 한것은 교도소 방문과 아울러 여성수감자 교화사업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 대구Y의 특징적인 프로그램이라고 할수 있다.
대구지방은 기독교인들이 보수적인 편이어서 초교파 운동인 YWCA가 일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대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사회적인 의미를 갖고 사회 속에 직접 뛰어들어 일하는 YWCA의 프로그램이 때로는 이단시되는 경향이기 때문에 Y가 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것이 대개 보수적인 교회의 태도였다. 이런 상황은 대구 뿐만은 아니었다.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방이 거의 비슷하다.
해방이 되면서 처음으로 총무직을 맡았던 최귀희씨는 끈질기게 교회와의 이런 미묘한 관계를 극복하였고 아직도 무급지도자로서 YWCA의 일을 계속하고 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회관 마련과 더불어 프로그램이 활발해졌다. 68년부터 모금을 시작하여 71년9월 연건평 2백70평, 지하1층 지상4층의 아담한 건물이 완공되었다. 11년이 지난 지금에는 벌써 회관이 좁아 프로그램을 다 없수 엾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대구Y의 프로그램 방향이 보수적인 교회와 보조를 같이하여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었으나 이제 사회성을 띤 소비자보호사업과 농촌개발 사업에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약간의 체질개선이 된것이다.
어려운 상황속에서 비약하기 보다는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처사라는 것을 증명해준곳이 대구YWCA의 경우인것 같다.
대전 YWCA는 해방 다음해인 46년에 창립되었다. 대전은 충청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지만 교통도시이기 때문에 본바닥 사람이 별로 많지않고 다른데서 오는 사람도 임시로 머물렀다 가는 인구가 많은 곳이기 때문에 회원 확보가 좀 어려운 곳이다. 따라서 활동이 연속성을 가질수 없다는 것이 대전 Y에서 일하는 이들의 고민인 것이다.
대전Y는 창설되던 해 회관(대지1백27평, 건평36평)을 입수하였으나 6·25때 소실되었다. 54년에 다시 회관을 신축했다 67년에 중앙으로 회관을 이전하였으나 불하 과정이 잘못되어 뜻하지 않은 손해를 보게되어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뿐만아니라 지도자 확보가 어려워서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김신옥씨가 회장이 되면서 교육활동에 관심을 갖고 일을 했다. 계속되지는 못했지만 근로청소년들을 위한 야간학교는 상당히 뜻있는 일이었다.
63년에는 버스 안내원 교육을 위해 「인혜학윈」을 설립했다.
발기인 22명으로 시작한 신용협동조합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크게 늘어나고 있고 소비자보호사업은 소비자 의식이 강하지 못해 활발하지 못했으나 최근에 와서 약간 성의를 보이는것 같다.
대학Y 활동에 있어서 그동안 지방Y에 책임이 없었던 것이 구조변경으로 인해 대학Y가 지방으로 이양되면서 대전에 있는 대학에 대학Y를 새로 조직하였고 상당히 의욕적으로 대학Y 활동을 했다.
76년 당시 부회장 임규이씨(현 회장)가 이에 대한 책임을 맡아 『대학Y활동이 활발해지면 Y틴 지도자가 나올 수 있고 앞으로 성인회원사업을 위한 자원지도자 육성의 기초작업도 된다』고 하며 앞으로 성인회원 확보에도 도움이 될것을 기대하는 중에 새로운 구조의 시도를 잘 활용할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학Y 회원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대전에 있는 대학의 재학생들은 서울서 오는 학생이 많아서였다.
대전 역시 도시 크기에 비해 Y활동이 다양하지 못하나 6,7년전부터 현총무 이정순씨가 일을 맡으면서 안정권에 들어 앞으로는 기대되는 바 크다고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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