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방쪽지가 증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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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공소를 이끌이간 서울지검 정보부의 부장검사였던 조인구변호사의 증언.
『진보당 사건을 두고 볼때 정치란 것이 어떤건지 모르겠다. 휴전 직후에는 북진통일이던 것이 이제는 평화통일로 바뀌어 북진통일이란 말은 간데가 없어졌다. 휴전뒤 55년부터인가 경제에는 혁신세력의 규합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 혁신세력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을 때인 57년 간첩 박정호가 달러화를 암시장에서 바꾸다 체포됐다. 박정호의 체포와 진보당사건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배경의 일부로 이해할수 있다.
박은 54년 한국정계에 이른바 제3세력이 두각을 나타내는 기운이있자 김일성의 직접 지령을 받고 남파되었다. 그는 해주에서 탈출형식으로 귀순했다. 그는 그가 전향한 것을 우리측에서 믿게끔 하기위해 호송원 2명을 사살까지 하며 탈출했다.
그는 위장귀순후 3년동안 아무런 활동을 하지않고 잠복해 있다가 57년에 들어 활동을 시작하기위해 달러를 바꾸다 체포된 것이다.
그가 바꾸려한 달러화는 혁신세력 규합자금으로 쓰기위해 가져온 것이다. 북은 6·25의 무력통일이 좌절되자 평화적 침투로 전환, 자유·민주 두 보수정당을 제외한 정치세력과 손을 잡으려던 때에 혁신계의 움직임이 있자 그들의 목표와 합치된다고 보고 자금원조를 하려한 것이다.
이러한 혁신계의 최초의 집합이 서상일 장건상 조봉암 등이 모인 「광릉회합」 이다.
이러한 때에 죽산이 발표한 「평화통일에의 길」은 당시로는 혁신적 슬로건으로 이북의 주장과 비슷한 것이었다. 당시 6·25 직후의 잿더미위에서 그런 과격한 주장은 납득할수 없는 것이었다. 중립국 감시하의 총선거란 것이 이북의 주장그대로였고 남북 동시 선거란 48년 유엔 결의에 의해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대한민국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결국 검찰은 이 글을 문제삼아 진보당 관계자를 구속했다.
당시 워낙 사회적 반향이 커 구속적부심사도 파격적으로 공개해 내가 검찰내부로부터 비난을 받기도했다.
문제의 양명산과 죽산은 일제때 만주에서 만났던 것같다. 다른 모든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죽산이 양으로부터 선거자금 2만5천달러를 받은 것은 죽산의 딸도 증언한 것으로 확실한 것이다.
또 하나 형무소안에서 죽산이 양에게 쪽지를 보내 돈을 주고 받은 것을 부인하도록 연락했는데 본인은 끝내 부인했지만 검찰로서는이 쪽지가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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