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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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내가 작가를 생업으로 알고 중단편 소설을 열심히 써대기 시작하던 70년대 초에서 3년간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종신 집권체제를 노골화하기 시작한 숨가쁜 기간이었다. 전태일의 분신과 광주대단지 소요사건이 일어났고 김지하의 '오적'과 내 '객지'가 연이어 발표되었으며, 남북 접촉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동시에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대학에는 무장군인들이 진주했고, 파월 노동자들이 KAL빌딩 앞에서 체불 노임 지불을 요구하며 소요를 일으켰다. 남북한이 공동성명을 내고 합의에 이르는 사이에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10월 유신에 들어갔고, 곧 뒤이어 도쿄에서의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남북 대화는 중단된다.

그때에 생각 있는 지식인들은 모여 앉기만 하면 민주주의의 죽음과 독재에 대한 저항을 속삭였다. 바로 그때가 시작이었으므로 지금은 세상이 다 아는 이름들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한 줌도 되지 않는 선후배들이 한 다리 두 다리 건너씩 얼굴과 마음을 익혀 나가게 되었다. 하루는 창비가 얻어들었던 청진동 신구문화사 건물에서 염무웅이 나에게 말했다.

-오늘 누가 황 형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같이 가보지 않을래요?

그래서 무교동 어름에 있던 어느 회사 사무실에 놀러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박윤배와 만나게 되었다. 그는 채현국.백낙청 등과 함께 경기고를 나온 동창생이었다. 채현국은 한남철과 문리대 철학과 동기로 키가 작달막하고 말씨가 빠르며 눈빛에 재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들 주위로 같은 연배의 갖가지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 모여 있었던 셈이었다. 내 기억에는 대학교수도 있었고 기자라든가 거의가 지식인이었는데 유독 박윤배만이 '협객' 출신이었다. 그 무렵에 조금 시차를 두고 백범사상연구소에서 만나게 된 백기완의 친구 방동규(별명 배추형) 역시 협객이었지만 서로의 개성이 달랐다. 지금도 궁금하게 생각하는 점인데 그야말로 지식인의 전형인 백낙청과 전혀 다른 박윤배가 속마음을 털어놓는 지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점이 백낙청의 탁월한 면모이기도 했지만 박윤배 쪽에서 보면 그가 백을 선택한 것도 돋보인다. 박윤배는 그들보다 두어 살 위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협객이 어떻게 경기고에 입학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본인의 말로는 전쟁 중에 피란지 학교에서 입학했다는 것이다. 총을 가지고 학교에 오는 녀석들도 있었다니 교실 분위기가 꽤나 험악했던 모양이다. 공부벌레만 있는 학교에서 박은 다른 학교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주먹에서 대표선수였다나. 여러 가지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박윤배는 고교 동창인 채현국의 권유로 탄광회사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의 탄광은 거의 무법천지라서 역시 주먹이 가까운 세계라 사주 입장으로는 그가 광부들을 적당히 '통솔'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가 도계에 내려가서 일년쯤 있던 사이에 삼십여 명의 광부들이 죽어 나갔고 그 시체들과 함께 유족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의 삶은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그의 말대로 그 주검들 앞에서 확 돌아서 버린 것이다. 그는 강원도 일대 광부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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