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국민정서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로마는 세계를 세 번 정복했다. 처음에는 군대로, 다음은 종교로, 마지막에는 법으로 정복했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붕괴와 함께 로마의 무력 지배는 끝났지만 기독교와 로마법에 의한 세계 정복은 계속됐다.

기독교는 전 세계 보편적인 종교가 됐고, 인격의 평등과 과실책임의 원칙 등을 천명한 로마법은 나폴레옹 법전(1804년)을 통해 구현됐다. 19세기 독일의 법철학자 루돌프 예링은 자신의 저서 '로마법의 정신'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나폴레옹 법전은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형벌도 없다'는 죄형법정주의를 확립했다. 이는 죄와 벌을 멋대로 재단하던 절대 군주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시민사회로 나가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죄형법정주의를 부정하는 '국민정서법'이란 묘한 논리가 등장했다. 이 법은 손에 잡히는 실체도, 글로 기록된 문건도 없다. 하지만 국민정서에 부합한다는 조건만 충족하면 실정법에 구애받지 않는 불문율(不文律)이 되고 있다. 헌법 위에도 군림한다.

애매하고 추상적인 개념의 국민정서는 일부 시민단체와 학자의 뜻에 따라 구체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이 특정 사안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이를 일부 언론이 뒷받침해 주면 국민정서법은 '제정'된다.

국민정서법에 걸려들면 어떤 형태로든 죗값을 치러야 한다. 수십 년 전의 위장전입, 반세기가 넘은 부친의 친일 등의 문제로 국민정서를 등진 공직자는 현직에서 쫓겨나는 '망신형'을 당했다. 외환위기 직후 국민의 울분에 떠밀려 당시의 경제정책 책임자들이 사법처리됐다. 결국 무죄가 선고됐지만 당사자들은 6년 동안 수사기관과 재판정에 불려다니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국정원(옛 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를 놓고 내용을 공개하라는 국민정서법과 통신 비밀을 보장한 헌법이 정면 충돌하고 있다.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생스럽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法之爲道前苦而長利)'고 했다. 중국의 법가 사상을 담은 '한비자'에 나오는 말이다. 법 원칙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