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향기] 한겨울에 꽃 피운 조선의 온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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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月開花出於人爲子(동월개화출어인위자)-겨울에 핀 꽃은 인위적으로 나온 것이다.

조선 성종실록 제 13권에 기록된 왕의 이야기 중 한 부분이다. 1471년 1월 추운 어느 날 궁궐의 꽃을 키우는 기관인 장원서에서 영산홍 한 분을 올렸다. 그러자 왕은 "초목의 꽃과 열매는 천지의 기운을 받는 것으로 각각 그 시기가 있는데 제때에 핀 것이 아닌 꽃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바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한겨울에 꽃을 피워 진상했다는 기록은 사실일까. 그 해답은 15세기 중반 의관이던 전순의가 쓴 생활과학서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담겨 있다. 당시 농업기술서인 이 책의 '동절양채(冬節養菜)'편, 즉 '겨울에 채소 키우기' 항목에는 온실 건축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남쪽을 제외한 삼면을 흙벽돌로 쌓고 바닥은 구들로 만들어 그 위에 30㎝ 정도의 배양토를 깔았으며, 45도 경사진 남쪽 면은 창살에 기름 먹인 한지를 붙여 막는다. 판유리가 없던 터라 책 종이로 쓰는 한지에 들기름을 먹여 채광창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기름 먹인 한지는 큰 빗방울을 막으면서도 안에서 생긴 작은 수증기 입자는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했으니 '고어텍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또 기름 때문에 팽팽하게 얇아지면서 반투명해진 한지는 빛 투과성도 좋았다.

이와 함께 바닥은 온돌 방식을 이용, 흙의 온도를 25℃로 유지했으며, 불을 땔 때 아궁이에 가마솥을 얹고 물을 끓여 수증기가 온실 안으로 흐르게 했다. 실내 온도와 습도를 함께 조절했던 것이다. 세계 최초인 것으로 알려진 독일의 온실은 1619년에 지어졌다. 기록대로라면 조선의 온실이 유럽보다 최소 170년 이상 앞섰다.

게다가 습도와 온도를 동시에 조절할 수 있어 현대 온실보다 더 과학적이었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 기술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고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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