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사이비은행 …‘검은돈’ 1조 거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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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름을 ‘외계인’이나 ‘마돈나’라고 적고 주소를 ‘영등포교도소’ ‘싸우디’라고 적어도 되는 사이버 금융계좌가 개설됐다. 그렇게 만든 계좌는 여느 은행계좌처럼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이용해 입금·출금·이체가 가능했고 직불카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정상적으로 은행에서 신용카드나 직불카드를 발급받기 힘든 신용불량자들이 주로 이용했지만 자금 추적을 따돌리려는 도박업자나 보이스피싱 조직도 여기에 계좌를 개설하고 거래했다.

 이런 불법 사이버금융 업체 네 곳이 검찰에 붙잡혔다. 대구지검 서부지청은 27일 불법 사이버은행을 운영한 혐의로 4개 업체 대표와 임직원 등 6명을 구속기소하고 이들의 영업을 도운 4명 역시 재판에 넘겼다고 밝혔다. 이들은 자본금이 30억원 이상이어야 한다는 등의 금융업 기준을 갖추지 않고 허가 없이 영업했다. 이 같은 불법 사이버은행이 적발된 것은 처음이다.

 적발된 업체 중 제일 큰 곳은 회원이 13만8000여 명이고 총 거래대금은 1조200억원이었다. 4곳 전체의 회원은 14만4700여 명. 전체 거래 대금은 약 1조400억원이다. 검찰은 이 중 상당 부분이 자금 세탁을 위한 것 등 검은돈인 것으로 보고 있다.

 불법 사이버은행들은 가맹점을 모집해 ‘캐시카드’란 이름의 직불카드까지 발급했다. 카드 가맹점이 전국 1600곳에 이른다. 가맹점 중에는 대리운전 업체도 있다.

 불법 사이버은행들은 우선 자체·외곽 영업조직을 통해 카드를 뿌렸다. “카드를 쓰면 가맹점에서 7%를 포인트로 적립해 준다”고 홍보하며 회원을 유치했다.

 가입 희망자들은 인터넷으로 회원이 됐다. 카드번호와 전화번호 등을 입력하면 사이버계좌가 개설됐다. 이 과정에서 전화번호나 이름, 주소를 엉터리로 입력해도 전혀 따지지 않았다. 전화번호에 ‘010-1111-1111’, 이름에 ‘난재벌’이라고 기입해도 무사 통과였다.

 회원은 일단 정상 은행계좌에서 사이버계좌로 돈을 보낸다. 그 다음은 여느 은행계좌처럼 출금이나 이체를 똑같이 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 거래도 가능했다. 불법 업체들은 출금이나 이체 시 건당 300~500원, 가맹점에서 카드를 쓸 때 3% 수수료를 받아 챙겼다. 일단 사이버계좌를 튼 뒤에는 자금 추적이 불가능하다. 검찰은 “도박업자나 보이스피싱 조직, 다단계 업자 등이 계좌를 이용한 게 6000여 건에 달한다는 진술을 얻었다”고 했다. 대구지검 서부지청 송상현 차장검사는 “불법 사이버계좌가 자금 세탁이나 뇌물 수수 등에 활용됐을 것으로 보고 이용자들을 추적 중”이라고 말했다.

 불법 사이버은행은 예금자보호법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 문제가 생기면 돈을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다. 사이버 보안도 취약했다. 한 업체는 올 6월부터 최근까지 10여 차례 해킹을 당해 예금 12억원이 새나갔다.

 불법 사이버은행 거래가 1조원이 넘을 때까지 몰랐던 금융 당국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금융감독원 측은 “한 해 2만 건의 불법 사금융 등을 적발하지만 이번 건은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대구=김윤호 기자 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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