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사의 쟁점|양국학계, 무엇을 어떻게 보나(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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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진문화는 후진지역으로 파급되게 마련이다. 고대의 동양문화나 정치질서는 항상 중국이 진원지로서 센터의 역할을 하였고 한반도는 그 부심으로서 중국문화를 수용, 개성있는 문화를 건설하였다. 이에 반해 일본은 동양의 외곽에서 문화의 아웃사이더로서 그보다 한발짝 앞선 우리나라를 통해서 선진문화를 접할수 있었고 개발을 이룰수 있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서만이 중국과 접촉할 수 있었으니 만큼, 우리나라의 안내나 지도없이는 그들의 문화개발이나 발전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동양문화의 성격이나 흐름과 고대동양질서의 대세론으로 보아 한반도 없이는 그들의 문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은 중국문헌에 예외없이 동이전의 맨끝에 간략히 서술되게 마련이며, 중국의 입조사의 서열에도 항상 말석을 차지할 뿐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일본이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한반도를 제치고 직접 중국에 접근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나타난 것이며, 지금까지도 몸에 밴 도오민족의 대륙편애성향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강조하는 유수사·유당사도 실은 한반도의 선도적 입장을 극복하려는 현실적인 문화운동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8세기이후 유당사의 항로를 한반도를 피해서 남쪽의 대해를 건너가는 모험을 택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교활한 도서민족의 이중성은 그러한 견당사의 파견속에서도 신라에 꾸준히 유학생과 학문승을 파견하였으면서도 유신라사란것은 되도록 감추고 있다. 동시에 9세기이후 당과 신라가 쇠잔하자 견당사를 중지하고 국풍문화를 내걸면서 독자적인 자기문화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아직기나 왕인과 같이 타의적인 「귀화인」이 아니라, 스스로 흘러들어온「도래인」이라고 표시할 이유가 명백해진다.
특히 백봉문화(645∼710년)에 있어서 당풍이나 인도·서역의 영향은 인정하지만 신라의 역할을 부인하려는 일본의 입장은 근래에 발견된 고송총에서의 고구려영향을 외면하는 것과 그 때를 같이한다고 하겠다.
『삼국지』(동이전)에 의하면 왜인들은 「전신에 문신을 해서 짐승같았고, 일반백성은 맨발로 다니며 사계를 몰라서 파종과 추수로 때를 아는 정도의 미개인으로서 맨손으로 밥을 먹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서』(동이전)에도 「문자가 없어 다만 나무에 무엇을 새기거나 노끈을 매두어 표를 한다. 불법을 공경하여 백제에서 불경을 구해간 뒤에 비로소 문자가 생겼고, 점치는 것을 알게되었다」라고 기술되어있다. 이와같이 우리나라를 통해서 문명에 눈을 뜬 일본은 어느 정도 문화와 정치수준이 본궤도에 오르자 자신을 내세우기 시작하는 동시에 한반도로부터의 문화전래대신 대륙문화의 직수입을 내걸면서 지난날의 자신을 감추는데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그들의 고대문화(비조문화)는 삼국문화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인정치 않을 수없게 되었다. 일본은「한반도의 영향」을 되도록 축소하기 위해 유수사·유당사를 으례 강조하게 되었고, 894년의「유당사폐지」를 크게 기술하면서「국풍문화의 전개」를 내세우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문화속에 크게 자리잡은 신라의 영향을 가능한한 없애버리려는 의도가 포함된 것이다. 우리는 대개 백제나 고구려문화가 아스까(비조)문화를 이룩해 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까지도 일본문화에 준 신라문화의 역할이 축제술이나 조선술정도의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교과서의 내용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북야경평, 모리구, 전촌원징등 일본학자들은 비조문학 다음에 나타난 백봉문화에는 신라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신라(주로 통일신라)문화가 실제로 얼마나 일본문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실체는 무엇인가를 똑바로 알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경덕왕12년 (753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그해 8월에 일본의 사신이 왔는데 그 태도가 오만불손하여 왕이 끝내 만나주지 않아서 그들은 되돌아 갔다」. 이 짤막한 기록은 8세기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 것이다. 바로 전년에 일본은 1백20여명 규모의 유당사를 보낸 바 있는데, 왜 신라에도 사절을 파견했을까. 여기에 외형적인 관계가 아닌 내면적인 교섭의 뜻이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일본과 신라의관계를 몇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혁거세로부터 경순왕까지 10세기간에 34회의 침입(실제는 더 많았을 것이다)과 21회의 교빙등 67회의 대일관계기사가 있다. 이러한 기록은 얼핏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기 쉽지만, 그 의미는 과소평가 될 수 없다. 그 중에서 55회의 교섭 (전쟁과 평화관계)을 시대순으로 정리하면 친범은 상대 32회, 중대 2회, 하대엔 없으며 교빙은 상대 10회, 중대 3회, 하대 8회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의 대신라관계가 전쟁(침범)이 절반이고 동시에 평화적 교섭도 부단히 계속되었음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들의 침략이 대부분 왕권이 절대화되지 못한 상대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34회의 침범이 7세기이전에 저질러졌으니 우리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할때 이루어진 사실이다. 동시에 그들의 침략속에는 문화약탈이나 정보입수등이 내재되었음은 물론이려니와 그들의 침범이나 교빙을 막론하고 대개 3∼5월에 집중적인 관계로 나타나고있다(48회중 3∼5월중에 31회).
이것은 그들의 침략이나 교섭이 춘궁기의 기근과도 관련이 있는 약탈적 목적이었다는 점을 도외시할수 없다.
7세기 후엽 신라가 통일왕국을 마련하고 국력이 신장되면서 그 문화가 융성함에 미치자, 그들은 침략 대신 적극적인 문화흡수의 교섭사를 보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일본 성덕태자의 섭정기(593∼621년)에 수와는 4회의 교섭이 있었으나, 삼국과는 16회(고구려5회· 백제4회·신라7회)의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대륙문화보다 우리 문화 (특히 신라문화)에 높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점이 잘나타나 있다.
7세기 중엽 이후 신라와 당이 밀착되면서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에 빠지게 되었다. 더구나 통일신라는 강력한 당의 영토야욕을 분쇄하면서 국가의식을 높이 고조시키고 있었으므로, 대화개신이후 일본은 새로운 정치·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교훈과 모델이 필요하게되었다. 무열왕계의 강력한 전제왕권과 찬란한 신라문화속에 깃든 국가의식은 형식적인 유당사로서는 그 속에 담겨진 문화와 정신을 수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일본은 676년(문무왕16년) 유신라대사와 동소사가 임명되었고, 고위층으로 구성된 유신라사는 703년(성덕왕2년)에 2백4명의 대규모의 사절을 이끌고 신라에 파견된 것이다. 특히 685∼689년의 5년간에는 4차의 학문승이 신라에 보내졌고, 그후 계속하여 유학생·구법승이 당을 제치고 신라항을 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701년 일본의 대보율령찬정에는 신라유학생이 참가하였다는 사실이 관욱씨의 연구에서도 밝혀진바 있다.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7∼8세기 일본인의 「신나러시」이다. 당나라의 야욕을 분쇄하고 민족을 수호한 신라인의 「국가의식」과 당시 활약하던 원효·강수·설총등의 불교·유교의 세계적 수준은 당시 일본 지배계급과 지식층에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원효등 신라 고승에 의한 불경의 주역서나 유학자들의 높은 저술은 그대로 일본의 불교·유교의 실질적 기반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707년(성덕왕6년) 한해에 5차의 학문승이 신라에 파견된 점이나, 백봉문화기에 당에는 11차뿐이지만 신라에는 14차의 학문승을 보냈던 점에 뚜렷이 나타난다.
이와같이 일본의 신라문화 흡수는 전제황권의 확립으로부터 문화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게되었다. 나랑에 있는 일본최대사찰의 하나인 고시대사는 황룡사의 축조정신과 건축양식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며, 약사사의 쌍탑식가람배치는 사천왕사·감은사의 바로 그것이었다.그의 불상이나 탑파에 있어서도 신라의 특징을 받아들여 편의적으로 수정하여 그들의 국풍을 이룩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백봉문화는 율령이나 정치제도뿐 아니라 불교·학문·예술에 있어서도 신라의 것을 받아들여 성립된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식이나 불국토의 이상까지 사상면에서도 신라의 그것을 이어 받은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신라문화에 대한 동경과 욕구는 804년(애장왕5년)과 883년(헌강왕8년)에 각각 일본이 보낸 금3백냥의 무게와 가치에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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