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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애독자와 더불어 17년…역대집필자들의 『분수대』여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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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옛날 「분수대」를 쓸 때, 이무렵이 되면 으례 독서론을 폈다. 고금의 문장가치고 독서를 논하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독서론하면 얼른 떠오르는 이름이「프랜시스·베이컨」-띄엄띄엄 읽을 책이 있고, 대충 훑고치울 책이 있고, 잘 씹어서 소화해야할 책이 있다는 고전적 독서론이 그것이다.
「베이컨 이 살던 영국 17세기하고 오늘의 한국하고는 물론, 우리가「분수대」를 쓰던 10여년전과 오늘날의 독서상황이 크게 변모했다. 전통적인 독서를 위협하는 TV가 기승을 부려서 정신차리기가 어렵게됐고, 속독법이라는 것이 상업화했고, 학교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마음놓고 양서를 소개하거나 읽기를 권장할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사정이 생겼다.
이번학기 초에 「베이컨」의 우상론을 교실에서 읽었다. 인간이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는 아집이나 편견을 우상이라고 하고, 그것을 서너가지로 분류해서 해설해 놓은 대목이다. 제딴에는 일사불란한 과학적 방법론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지만,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우리 대학생들이 배우는 자연과학개론같은 초보적인 이야기에 비추어보면 허점투성이다.
그런 식으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다가는 웃음거리가 되기 안성마춤이다. 제 아무리 재주있고 똑똑한 사람도 타고난 시대의 제약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가 「베이컨」이다.
그런데 이번에 학생들하고 「베이컨」을 읽는 동안에 그의 우상론의 첫대목에 나오는 부족의 우상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베이컨」이 우상 (아이돌라)이라고 한것은「환상」이라는 요즘말로 고쳐서 알아 듣는 편이 낫다. 문제는 부족이라는 말이다.
트리부스라는 말을 부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베이컨」은 소위 부족을 뜻하지 않고, 인류전체 또는 보편적인 인간을 뜻하는 말로 「부족」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말이 문명된 로마인에 대해서 모든 미개부족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었지만, 「베이컨」의 소위 부족의 우상은 미개부족들 뿐아니라, 문명된 로마인들까지 온 인류가 한결같이 모시고 다니는 악신이었다.
사물이나 인간을 놓고, 제대로 연구해 보지도 않고, 다분히 감정에 치우쳐서 이렇다 저렇다하고, 그럴싸한 일반론을 즐겨 농하는 버릇이 그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버릇이다.
그러나 「베이컨」이 부활해서 다시 우상론을 엮는다면 부족이란 말을 좀더 상식적인 뜻으로 써서 전인류가 아니라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부분적 분파적인 뜻으로 쓰고, 좀더 알기 쉬운 부족의 우상론을 펴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가령 일본인들이 이웃 부족들을 괴롭혀온 일본족 특유의 우상들을 간과했을리가 없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그들이 좀처럼 탈피할수 없는 우상들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우리 나름의 우상들이 있지 않을까. 모든 인간이, 또는 모든 부족이 태고적부터, 모셔 온 우상들을 일조에 털어 버릴수는 없다.
그러나 우선 일인들과 우리 양부족이 각기의 우상들을 어느정도 털어버린 연후에 비로소,평등과 공정과 호혜의 사귐이 가능해질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다.
김진만<고대교수·65∼66년 본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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