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난' 자해 폭로전 번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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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그룹 오너 일가가 계열사 유상 증자에 참여하기 위해 빌린 은행 돈의 이자를 회사가 대신 내온 것으로 나타났다. 두산산업개발은 1999년 유상증자 때 박용성 회장 등 오너 일가 28명이 빌렸던 대출금 이자를 그간 회사 돈으로 갚아왔다고 확인했다. 5년 동안 138억원(원금 293억원)에 달한다. 이 이자를 갚기 위해 회사는 대주주 동의 아래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두산 측은 10일 이 같은 사실이 한 언론을 통해 보도된 직후 이를 인정했다. 또 두산 측은 당시 직원들에게도 수백만 ~ 수천만원씩 은행에서 빌려 유상증자에 참여케 하고 이 이자도 회사가 대납했다고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주식 처분권을 회사에 위임토록 했다.

두산산업개발이 2797억원의 분식회계 사실을 고백한 지 이틀 만에 또 다른 비리가 터진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두산산업개발이 '존폐 위기의 회사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분식회계를 했다'던 시기(97 ~ 2001년)와 겹친다. 그런 가운데 두산산업개발은 95년, 96년, 98년 등 세 차례에 걸쳐 모두 53억5000만원의 배당금을 주주들에게 지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간 중 두산산업개발은 서류상은 흑자였지만 분식 부분을 빼면 매년 97억 ~ 542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두산 관계자는 "부채비율을 낮추지 못하면 퇴출당하는 상황에서 유상증자 당시 나온 실권주를 대주주들이 사줬다"며 "이자 대납은 오너 가족들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실권주를 사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박용성 회장 등은 그간 회사가 대신 내주었던 이자 비용 115억원을 이달 초 모두 갚았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두산 측은 이번에 불거진 '이자 대납건'에 대해 박용오 회장 측이 흘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산의 한 관계자는 "박용오 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있으면서 관리하던 자료들을 가지고 나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에 '이자 대납'을 폭로한 것은 박용오 회장 재임 시절 있었던 분식회계를 두산그룹이 8일 고백한 데 대한 역공 차원으로 풀이된다. 박용오 회장 측은 이날 전화를 받지 않는 등 외부 접촉을 피했다.

박용오 회장의 두산산업개발 분리 요구에서 시작된 오너 형제들 간의 싸움은 이제 그 끝을 알 수 없게 됐다. 박용오 회장 측이 동생들인 박용성-용만 형제의 비자금 조성 혐의를 검찰에 진정함으로써 검찰이 수사에 나선 것은 1라운드에 불과했다. 박용성 회장이 형인 박용오 회장 때의 분식회계 사실을 고백한 2라운드를 거쳐 이젠 3라운드로 접어든 것이다. 아직 두산그룹은 맞대응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들은 "박용오 회장이 10년간 회장을 하면서 알고 있는 게 너무 많다"고 말한다.

대한변호사협회 민경식 법제이사는 "회사가 개인 부채에 대한 이자를 지급했다면 이자를 지급토록 한 오너 일가족은 횡령, 이자를 지급한 회사 측은 배임 혐의가 있다"고 말했다. 또 분식회계는 고백하면 문제삼지 않기로 했지만 이 기간 중 배당금을 지급한 행위는 배임으로 볼 수 있다고 민 변호사는 덧붙였다.

박용오 회장도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비리가 저질러졌던 시기가 모두 박용오 회장이 그룹회장을 맡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박 회장의 빚에 대해서도 회사 측에서 23억원의 이자를 갚아줬다. 또 두산건설이 고려산업개발을 인수합병(M&A)했던 2000년은 분식회계 기간으로 M&A 때 부당 이익을 취했다는 비난이 시장에서 일고 있다. 당시 합병 비율은 두산건설 1주당 고려산업개발 0.76주로 결정됐다. 그러나 분식으로 두산건설의 회사가치는 실제보다 훨씬 고평가됐고, 이 덕에 두산건설 주주 입장에선 유리한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양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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