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순수, 꿈 … 그곳에 가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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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화제다. 10일 현재 개봉 일주일 만에 관객 200만 명을 넘어섰다. 6.25를 배경으로 남북의 이념대결이 결국 무너지는 강원도의 한 산골마을을 주목한 '웰컴 투 동막골'은 우리 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이상향을 제시한다. 한국 영화 속에 표현된 유토피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어느 날 영화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당신들이 보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

우리들 중 누군가는 더위에 지쳤고, 누군가는 말이 통 없으며 다른 이는 희망이란 것을 얼마 전 길가에 버렸다. 고민 끝에 한 사람이 답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요"라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영화는 언어를 대신해, 스크린을 통해 우리의 바람에 화답한다. 제목은 '웰컴 투 동막골'. 기억 한구석에서 숨어지내던 아스라한 꿈과 순수함을 불러내는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서 역사의 강박에서 자유로운 유토피아를 세운, 매우 예외적인 업적을 이뤄냈다.

등돌린 사람들이 화해하며 총칼을 잠시 거두게 되는 곳. '웰컴 투 동막골'에서 한국전쟁의 긴박함은 호흡을 늦춘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동막골에서 마주쳤을 때, 상황은 의외의 코미디로 풀려가기 시작한다. 감자를 캐고 옥수수를 따서 생활하는 마을사람들은 국군과 인민군, 그리고 연합군의 구분이나 그들의 심각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약간 정신나간 채 머리에 꽃을 꽂은 아가씨는 수류탄 안전핀이 "가락지!"라며 좋아한다. 전장의 피비린내에 길들여 있고 생사의 갈림길을 경험한 군인들은 맥이 탁 풀린다. 마을 주민을 돕는 나비떼는 순수와 동심의 세계 동막골을 신성함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어딘가 낯익다. 상실한 순수성과 자연의 위대함, 그리고 모성의 궁극적 승리를 강조하는 영화들이 스쳐간다. '선생 김봉두'에서 촌지만 밝히다가 강원도 오지로 발령받아 산골 아이들의 순박함에 동화되었던 선생님은 어떨지. '집으로…'도 떠오른다. "프라이드 치킨!"을 외치는 손자 앞에 뜨끈한 닭 백숙을 얼른 내놓는 할머니는 우리들 가족의 초상과 많은 부분 겹친다. '웰컴 투 동막골'은 조금 더 팬터지의 마법에 기댄다. 수류탄이 터지자 마을 창고에 있던 옥수수가 팝콘으로 변해 눈꽃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국군과 인민군이 어울려 멧돼지를 잡는 모습을 CF처럼 포착한 장면은 월드컵 4강 신화의 순간처럼 짜릿하다.

돌이켜보면 한국영화에서 팬터지 전통은 튼실하지 못했다. 정치적 억압과 문화 검열 등으로 현실에 충실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리얼리즘 영화가 주류를 이뤘다. 유신과 광주의 역사가 창작자의 상상력에 차가운 물을 끼얹었던 것. 사정이 이러하니 예전 한국영화의 팬터지, 그중에서 유토피아는 그저 멀기만 한 곳이었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에서 사회와 대학에서 정치적 억압을 느껴야 했던 청춘은 술만 마시면 동해바다로 가고 싶다고 노래한다. 어느 날 동해바다에서 어느 친구가 몸을 훌쩍 던져 자살한다. 요컨대, 비극적 이상향으로 나타난 것이다.

도피처로서 유토피아는 마성(魔性)의 감독이라 일컬어지는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77)에서도 나타난다. 이청준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이어도라는 환상의 섬을 소재로 한다. 어느 기자의 실종을 통해 그의 행적을 둘러싼 비밀, 그리고 사람들이 꿈꾸는 어느 섬의 신화가 부각되는 '이어도'는 충격적이다. 죽음과 에로스, 그리고 샤머니즘이 충돌을 거듭한다. 신기루 같은 섬 이어도에 대한 갈망은 시대에 절망한 당시 예술인의 한탄으로도 읽힌다.

이후 한국영화에서 유토피아에 관한 상상은 종교와 사랑이라는 개인적 영역으로 옮겨간다.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93)에서 길떠난 한 아이는 스님과 범죄자.의사 등의 인물을 만나는 과정을 거쳐 세상의 풍경을 관찰한다. 불교적 가르침을 은연중에 역설한 것이다. 결국 영화 속 아이는 사람들 마음의 중심에 놓인, 극락의 입구를 찾는다. 80년대부터 영화를 통해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한 바 있는 장선우 감독은 '화엄경'에서 모든 개인에 깃든 이상향을 해법으로 내놓는다.

이명세 감독은 '첫사랑'(93)에서 기막힌 상상력을 영상으로 옮겼다. 선생님을 사랑하게 된 여대생의 심리를 촘촘하게 그려낸 이 영화는 만화적 기법을 사용해 사랑의 감정,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꿈꿀 법한 환상의 공간을 수놓은 바 있다. 벚꽃이 핀 달밤이나 자전거를 탄 인물들, 시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는 '첫사랑'은 낭만의 영화라 칭할 만하지만 시대적 배경에는 애써 무심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최근 한국영화 속 유토피아는 역사의 무게에 중압감을 느끼거나 무심하기보다 역사를 아예 새로 쓰는 과정에서 건설된다. 남북한 병사가 우정을 나누며 서로 형과 동생으로 부르는 민족적 유토피아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지나 '웰컴 투 동막골'에 이르렀다.

'웰컴 투 동막골'은 한국 팬터지 영화에서 분기점이 될 것 같다. 분단과 이데올로기라는 그늘에 가려졌던 한국영화에서 진짜 팬터지의 세계가 허락된 것이다. 다만 완성도에 대한 애착 때문인지 후반부가 다소 길게 느껴지며 영화적 설정이 군데군데 빛을 잃은 대목도 눈에 띈다. 좀 더 가벼운 공상으로 남았어도 실망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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