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내우」배출 노린 마르코스 미국행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7년동안 필리핀을 통치해온 페르디난드·마르코스 대통령(65)이 14일 집권직후에 이어 두번째로 방미길에 올랐다.
그의 방문목적은 중병을 앓고있는 필리핀경제와 전국의 절반지역에서 준동하고 있는 공산반란세력 진압문제 등을 협의하는 것이다. 반면 마르코스를 맞이하는 미국측은 아시아지역의 전략요충인 필리핀 군사기지의 장래와 1인통치에 따른 인권문제 등을 주요협의대상으로 꼽고있다.
두 나라는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상호의존관계를 증진해야할 단계에 놓여있다.
즉 필리핀은 대외원조를 전적으로 미국에 의지해야하고 미국은 수백만의 해군기지, 클라크 공군기지 확보가 소련의 인도양-태평양 세력확장을 저지하는데 가장 큰 관건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스는 이들 두 기지에 대한 임대료 인상을 요구해왔을 뿐 폐쇄조치 등의 위협은 없었으나 미국은 재계약 연도인 83년에 이들 기지의 장래를 확고히 하려는 속셈을 갖고있다.
그의 이번 여행은 미국에 있는 필리핀 망명자들과 인권탄압을 비난해온 일부 미 의회의원들로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등 출발에서부터 난관을 겪었다. 필리핀 국내에서도 그의 미국방문기간중 반대파에 의한 반란설이 나도는 등 말썽이 그치지 않았다.
2차대전과 1946년 필리핀독립을 거치면서 맹방의 관계로 맺어온 미국은 군사기지 임대료와 개발자금·사회보장제도·보조금 등으로 연간5억달러를 지원하고 있으며 기업투자액도 13억달러에 이른다.
그런데도 필리핀의 경제사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있다. 그것은 5천2백만의 인구중 3분의1이 국제시장에서 헐값에 거래되고 있는 코코넛 판매수입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구리 등의 원자재수출도 극히 미미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계은행(IBRD)이나 국제통화기금(IMF)측은 필리핀경제가 정부당국의 발표보다는 훨씬 더 나빠 83년말 이전까지는 호전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으로 분석, 미국 은행이나 다른 채권자들은 이 나라에 외채 판제능력 상실의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있다.
빈곤의 그림자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마닐라 변화가의 밤거리는 유류절약정책으로 암흑으로 변했고 실업률도 20%에 육박하고 있다. 2년제 대학을 나온 여성은 운이 좋아야 승강기 안내원이 될 수 있고 도처에서 범죄와 폭력이 들끓어 희망을 잃은 많은 시민들이 미국이민 비자를 얻기위해 대사관이 문을 열기 1시간30분전인 상오6시30분부터 줄을 지어 기다리는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다. 코코넛농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하루 기껏 1달러20센트의 일당을 받는 정도여서 상당수가 연간 36달러의 학비를 내지못해 자녀를 취학시키지 못하는 실정이다.
마닐라 남쪽 3백60km 떨어진 비콜지방은 6천∼8천명의 모슬렘 분리주의자 반란군이 극성을 부려 마르코스에게 목의 가시가 된지 오래다.
빈곤은 필리핀 공산당게릴라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있으며 정부군의 무차별 진압작전은 양민들이 반란군에 가담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마르코스는 반군들을 『전쟁에 광분한 폭도들』이라고 지탄하면서 정부에 위협적인 존재는 될 수 없다고 큰소리치고는 있으나 남예멘 등지에서 사들인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이들의 세력이 날로 증강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81년초 마르코스는 9년간 지속되어온 계엄령을 해제했으나 정적들에 대한 탄압의 고삐는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지난8월 그는 노동조합대표와 반마르코스 단체들이 정부전복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80여명을 검거했었다. 한 외교관은 마르코스가 이런 방식으로 미리 선수를 쳐 정적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체포함으로써 다른 모든 반대세력들을 억누르고 있다고 말한다.
마르코스는 이밖에도 범죄예방을 이유로 1천명의 사복요원들을 거리에 배치, 41명의 강도혐의자를 즉결 처분함으로써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는 했으나 그들이 모두 체포나 연행을 거부했기 때문에 사살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마르코스는 9월초 부인 이멜다 여사 등이 위원으로 있는 정부기구인 집행위원회에 오는 10월이나 11월께 대통령권한을 잠정 이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멜다는 자주 후계자로 거론돼 비판자들로부터 족벌정치를 꿈꾸고있다는 비난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15, 16일 이틀동안 레이건과의 회담에서는 마르코스가 무역거래혜택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겠지만 미국의 무역정책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고 군사기지 임대료의 대폭인상도 의회승인이 없는 한 크게 기대할 것은 못된다. 단지 상호방위협정을 더욱 공고히 한다는 레이건의 보장과 그에 따른 F-5E전투기나 해전용 하픈미사일 판매 등은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같은 대외적인 면보다도 마르코스가 진정 바라는 것은 국민들에 대한 체면회복이다. 레이건과 함께 백악관에서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그는 10년간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자신의 이미지를 깨끗이 씻고 득의만면하게 귀국하려는 생각이 간절할 것이다. 【워싱턴=김건진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