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교포의 취업차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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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3월은 재일동포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달이다.
학교에 다닐 때는 실력으로 일본인학생들을 누르던 동포학생들이 「취직차별」이라는 일본사회의 벽에 부딪쳐 괴로와하고 좌절하는 것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각급 학교에 취학하고 있는 재일동포 자제는 대략 14만명. 그중 사회진출을 앞둔 고등학생이 2만명, 대학생이 4천명 정도다.
매년 3월이 되면 이들 중 고등학생 7천명, 대학생 1천명정도가 학교를 졸업하며 그중 86%는 일본인학교에서 일본인들과 같은 졸업장을 받는다.
그러나 일단 졸업식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일본학생들이 가는 길과 재일동포 자제들이 가는 길을 확연히 달라진다.
일본인 학생들은 정부관리, 일류기업체에서 문을 활짝 열어 맞아들이는데 비해 동포자재들은 졸업장을 들고도 갈 곳이 없다.
매일 신문지면의 2페이지정도를 꽉 채우는 구인광고도 교포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운좋게 취직이 되어도 기다리는 것은 멸시와 냉대, 그리고 차별대우뿐이다. 이것을 참고 견디지 못하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결국 교포자제들에게 돌아오는 일자리는 음식점·물장수(술집·다방 등)·빠찐꾜·운전사·막노동 등 일본사회의 밑바닥수요를 채워주는 곳뿐이다.
일본의 식민통치시대에 할아버지·아버지들이 굴욕을 참으며 해냈던 일들을 그 2세, 3세들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취직차별의 전형적인 예를 「박종석 대 히따찌(일립) 재판」에서 볼 수 있다.
박종석씨(31·횡빈시 호총구 화천정2788)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69년 히따찌 제작소 입사시험에 합격했으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자 4년간 법정투쟁을 벌인 끝에 74년 법원판결을 받아 입사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인이 일류기업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저는 학교시절 학급위원장·생도회장까지 했읍니다. 일본인친구들이 모두 일류회사에 취직이 되는데 내가 왜 그들만 못한 나쁜 직장에 다녀야 하는가하는 자존심이 저를 히따찌에 도전하도록 했읍니다.』

<법적투쟁까지 벌여>
그는 지금 히따찌의 도즈까(호총)공장 소프트웨어부문에서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지금 일하는 소프트웨어공장의 종업원은 3천명입니다. 그중 한국인은 저 한사람 뿐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재판의 주인공이어서 그런지 직장에서 특별한 차별대우나 모욕을 받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3천명의 일본인들 틈에서 『하고싶은 말도 마음대로 못하는 정신적인 압박과 스트레스 때문에 3년 전에는 위장병을 앓아 1개월이나 입원했었다』고 실토한다.
그러나 그래도 박씨의 경우는 좋은 편이다.
일본인의 노골적인 멸시와 차별 때문에 직장을 두차례나 옮겨다닌 박정도씨(24·천기시 천기구 등기 2의3의16)의 경우는 「취직차별」의 실상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73년 가와사끼(천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처음부터 일류회사 취업을 단념한 채 대학을 가기 위한 아르바이트라는 생각으로 다나까(전중)전기라는 가족회사에 취직을 했다.
신문의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아라이(신정정도)라는 이름으로 직장을 얻었던 것이다.
주인은 그를 크게 신임해서 몇백만엔을 은행에 입금시키는 일도 그에게만 시켰다.
그러나 괴로운 일이 있었다. 주인 다나까의 부인은 무슨 언짢은 일이 있으면 『죠오센진 같은 바보짓 하지 말라』고 종업원들에게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박씨가 한국인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지만 그로서는 참기 어려웠다. 그런대로 반년이 지나자 주인은 정식사원으로 일하라고 제의해왔다. 그는 일단 이 제의를 받아들인 뒤 자신이 『한국사람이니 모욕적인 욕설을 삼가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가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주인의 태도는 1백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은행심부름을 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전에 없이 부표도 누가 끊은 것인가를 꼭 확인했다. 3개월 전 물건이 없어진 일이 있을 때 『네가 가져간 것이 아니냐』고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결국 입사 7개월만에 그곳을 그만두었다.
대학을 가봐야 쓸데없다는 생각으로 진학은 포기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이번에는 가미사와 전기라는 역시 전기공사 도급업자에게 종업원으로 취직했다.
이번에는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밝혔기 때문에 모욕적인 언사는 없었다.
그러나 봉급이 형편없었다. 79년3월에 10만2백60엔이던 봉급이 2년이 지난 81년3월에는 11만6천5백엔에 이르렀을 뿐이다.

<차가운 경멸의 눈길>
그는「취직차별」이 사라지려면 일본인들, 특히 젊은 세대의 의식이 바뀌어야 하고 회사관리자의 사고방식에 개혁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한다.
『젊은 세대가 한국인에 대해 편견을 갖는 것은 가정교육과 학교교육 때문입니다. 일본사회에서 한국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한국인을 멸시하고 경멸하는 얘기뿐입니다.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아시아에서 제일가는 국민이라는 의식이 공사장의 막노동자에게까지 뿌리깊게 박혀 있어요.』 박씨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생생한 말이다.
그는 국민학교 때부터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자라는 것이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재일동포 2세, 3세들의 실정이라고 말하고 박종석씨가 『재판으로 일본사회에 도전하는데 큰 자극을 받았다』면서 일본사회에서 떳떳한 대우를 받고 살기 위해서는 조국이 하루빨리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경=신성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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