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청 망신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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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로마 교황청이 요즘 뒤숭숭하다. 「암브로시아노 사건」이란 큼직한 국제금융스캔들에 말려들어 재정적으로 큰 손해를 보게된데다 정치적 비밀결사와 연루됐다고 의심받는가 하면 교황측근의 대주교가 이탈리아경찰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바티칸 안에서 꼼짝 못하는 등 손재수와 망신살이 뻗쳤기 때문이다.
지난 6월18일, 런던 템즈강의 블랙프라이즈교 밑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자의 목매단 시체가 발견됐다. 옷주머니 속엔 여러나라 지폐로 1천만원 남짓한 돈과 함께 모두 5㎏도 넘는 벽돌과 돌멩이들이 들어있었다. 신원조사결과 그는 밀라노에 본부를 둔 이탈리아 최대의 민간은행그룹이며 15개국에 자회사를 갖고있는 방코 암브로시아노의 총수 로베르토·칼비(62)임이 밝혀졌다. 1주일전 법망을 피해 이탈리아를 빠져나은 도망자였다. 런던경찰은 이 죽음을 자살로 처리했다.
교황청의 곤욕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칼비가 죽은 후 이탈리아정부는 방코 암브로시아노가 불법적 금융활동을 하며 무려 12억달러의 자금을 결손낸 사실을 확인했다. 암브로시아노는 곧 파산선고를 받고 해체됐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국은 칼비가 오랫동안 교황청의 금융기관인 IOR(종교사업기구), 속칭 바티칸은행과 깊숙이 거래해왔음을 들어 바티칸은행 관계자들을 수사대상에 올리고 교황청에 대해 암브로시아노의 관계를 소상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또 중앙은행인 이탈리아은행은 12억달러중 일부를 교황청이 물어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비쳤다.
교황청이 난감할 수밖에 없다. 불법행위는 전혀 모른다고 줄곧 뇌고 있지만 죽은 칼비와의 돈독했던 관계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칼비와 교황청의 인연을 맺어준 사람은 미켈레·신도나(62)였다. 그는 74년 뉴욕 한 은행의 파산사건과 관련돼 25년형을 받고 지금 미국 형무소에서 복역중이지만 당시엔 꽤 실력있는 재계인사로 60년대 중반부터 교황청 재정고문역을 맡고있었다.
71년 신도나는 칼비를 바티칸은행장 마르신커스 대주교에게 소개했다. 1942년 설립된 바티칸은행의 업무는 일반상업은행들과 다른 게 없다. 단 교황청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마르신커스 대주교는 요한·바오로 2세의 친구로 교황청의 주요직책을 두루 거친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69년 은행장이 될 때까지 금융업무엔 문외한이었다.
칼비와 대주교는 협조가 잘됐다. 몇년 사이에 바티칸은행은 암브로시아노 주식의 1·589%를 소유, 네번째로 큰 주주가 됐다. 71년 칼비와 신도나가 바하마의 내소에 세운 은행 이사명단에도 폴·마르신커스가 끼여있었다.
대주교의 이름을 사업에 이용하는 대신 바티칸은행은 내소은행 주식의 2·5%를 받았다고 신도나는 말한다. 이 주식지분은 나중에 8%로 늘었고 룩셈부르크 지주회사 주식도 4%를 갖게된 것으로 알려졌다.
바티칸은행은 이밖에도 자금 국외반출을 금하는 이탈리아법을 적용받지 않는 것을 이용, 암브로시아노 그룹과 다른 이탈리아은행들의 부탁을 받고 정기적으로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는 서비스도 했다고 신도나는 주장한다. 그 댓가로 바티칸은행이 예금하는 돈은 이자를 규정보다 1%씩 더 주었다는 것이다. 칼비는 74년 방코 암브로시아노의 은행장이 됐다.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바티칸과 가깝다는 뜻에서 「신의 은행가」란 별명도 붙었다. 그러나 운은 기울기 시작했다. 칼비의 행태가 아무래도 수상쩍다고 본 이탈리아은행은 칼비에게 산하은행들을 암브로시아노의 단일명칭아래 통합하라고 지시하고 뒤이어 78년 이 그룹의 회계감사를 한 결과 온당치 못한 거래가 많다는 것을 밝혀냈다. 바티칸은행과의 얽히고 설킨 관계도 드러났다.
다시 지난해부터 올해초까지 계속된 2차감사에서 결정적인 하자가 붙잡혔다. 78∼81년사이에 방코 암브로시아노 그룹 산하은행 및 자회사들이 각국 은행들로부터 긁어모은 12억달러가 허공에 떠버린 것이다. 돈의 정확한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이중 4억달러는 칼비가 암브로시아노 은행주식을 사들이는데 썼으나 달러화가 치솟고 주식액면인 리라화가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거품이 됐으며, 또다른 4억달러는 남미국가들에서 정치적 성격의 투자나 뇌물 등으로 사용됐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81년엔 또 「P2사건」이 터졌다. P2란 중세이후 유럽곳곳에서 조직돼온 프리메이슨 비밀결사의 한 분파인 「프로파간다·두에」의 약자다. P2의 단장인 리치오·겔리란 우파실업가의 별장을 경찰이 덮쳐 찾아낸 비밀단원 명부엔 칼비와 신도나를 포함한 이탈리아와 남미의 정치가·군인·실업가의 이름이 숱하게 적혀있었다.
P2는 남미의 반공정치세력을 지원하고 이탈리아 안에선 단원들이 정부주요기관을 장악해 국가를 쥐고 흔들려는 계획을 세워놓았고 칼비는 금융전문가로 이들을 돕고 있었다.
이 당시 칼비는 5년전 2천여만달러를 국외로 빼돌린 것이 발각돼 유죄판결을 받고 항소 중이었다.
유죄판결 후에도 얼맛동안 바티칸은행은 칼비 산하기업의 신용보증까지 해주는 등 협조를 계속했다. 그러나 82년6월 들어 마르신커스 대주교는 칼비의 보증연장요구를 거부했다. 곧이어 이탈리아은행이 암브로시아노의 국외대부내용을 밝히라고 요구하자 칼비를 제외한 은행 이사들은 협조하기로 결정했다. 끝장이란 것을 직감한 칼비는 위조여권으로 이탈리아를 탈출, 오스트리아를 거쳐 런던으로 갔다.
며칠후인 6월17일 칼비의 오랜 비서이며 P2조직일도 보았던 그라지엘라·코로커 여사(55)가 은행건물 4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표면상으로는 자살이었다. 유서는 칼비를 저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런던서 칼비의 자살시체가 발견됐다.
칼비가 진출한 모든 나라에서 수사가 진행되고 교황청에서도 3명의 저명한 금융인들로 자체조사반을 구성해 진상을 캐고있지만 아직 답해지지 않은 의문은 많다. 암브로시아노의 주식을 얼마나 가졌는지(10%란 설도 있다), P2조직과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험하고 사악한 세속의 금융활동에 교회의 은행이 그리 깊숙이 참여해도 괜찮은 것인지…. <타임지 9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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