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력 묻던 수능, 과목수 늘어나며 암기시험 전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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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연속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출제 오류가 발생하자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현행 출제 방식의 재검토를 지시했다. 청와대는 그동안 수능 출제 오류 문제를 심각하게 지켜봤다고 한다. 지난해 제기됐던 세계지리 오류 문제를 놓고 1년여를 끌다가 더 큰 혼란을 초래한 만큼 올해는 빨리 수습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이번 출제 오류를 신속하게 인정한 것도 청와대와 사전 교감한 결과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학 입시는 민감한 이슈이기 때문에 초미의 관심사였다”며 “오류가 10년에 한 번도 아니고 2년 연속 났는데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시스템 재검토를 지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서울 풍문여고에서 수험생들이 지난 13일 수능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한파 속에 64만 명이 수능을 치렀으나 출제 오류가 드러나 수험생들이 큰 혼선을 겪고 있다. [김경빈 기자]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수능을 왜 시작했는가 하는 취지가 바르게 실천되도록 근본 방안을 마련하라”고 강조했다. 교육부는 전날 출제 오류를 인정하면서 외부 인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수능 출제·운영체제 개선 위원회’를 다음달 중 발족하고 내년 3월까지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수능의 근본 취지’를 언급함에 따라 수능의 성격과 문제 유형, 대입 정책과의 연관성 등을 포함한 중장기적 대안도 강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수능은 1994학년도에 도입됐던 초기 수능과는 상당히 다르다. 박도순(72) 고려대 명예교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란 명칭을 만들고 수능을 도입해 ‘수능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제시했던 수능의 개념은 ‘대학 교육 수학에 필요한 학업 적성을 측정하기 위해 통합교과적으로 고교 교육과정의 수준과 내용에 맞춰 고차적인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이다. 기존 학력고사처럼 특정 교과별 시험이 아니라 통합교과적 소재가 문제에 활용됐고 암기로는 풀 수 없는 문항이 상당히 포함됐다.

 하지만 수능은 과목 수가 대폭 늘고 암기식 시험으로 바뀌어 왔다. 박 교수는 “역대 정부가 공교육 정상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고교에서 다루는 내용을 수능에 안 내면 고교 교육이 잘 안 된다는 이유로 모든 과목이 수능에 포함됐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된 EBS와 수능 연계 정책은 이명박 정부 때 ‘연계율 70%’로 확대된 뒤 현 정부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수험생들이 EBS 교재부터 외우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교육부가 난이도 목표를 정하는 것도 수능을 왜곡한 원인이다. 수능 출제기관은 평가원이지만 이명박 정부 때부터 교육부는 ‘만점자 1%’를 내세운 데 이어 올해도 쉬운 영어 수능을 예고했다. 실제 올해 수능은 풍선 효과를 막으려다 보니 수학B형마저 한 문제만 틀려도 2등급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교과 이기주의와 정치적 고려가 수능에 덧씌워지면서 누더기 수능이 되고만 것이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현 수능은 교과서·EBS 교재 속 지식으로 실수하지 않기 연습에 매달리게 한다”며 “도입 취지대로 기초학력과 논리적 사고를 확인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수능이 당초 취지를 살리려면 대입 전형 방안과 맞물려 대안이 나와야 한다.

박 교수는 “내신과 비교과활동이 담긴 고교 학생부와 면접 위주로 대학이 선발하고, 수능은 당초 취지대로 바꿔 일정 기준만 넘으면 대학 수학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는 자료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단기적으로 오류를 줄이려면 출제 기간을 대폭 늘리고 검토자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김성탁·허진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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