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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31>온양방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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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이겨레 어린이들아, 눈물을 함빡 내게로 넘겨다오. 너회를 대신하여 울어주마』 .
일제 민족의 암흑기에 선 이나라 어린이들에게 횃불을 쥐어 준 소년문화 운동의 선구자 방정환.
그는 방씨 가문이 낳은 큰 별이자 그의 이름처럼 사라질수 없는「어린이」 라는 낱말과 함께 이 민족의 정신속에 항상 살아 숨쉬는 인물이다.
짧은 인생 여정속에 시대를 앞서 걸으며 신시대의 장을 열고간 그는 봉건구조의 가족관계에 억눌려 있던 여성과 어린이를 해방시킨 사상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우리 귀에 너무 잘 익은 「날 저무는 하늘에/별이 삼형제/반짝반짝 정답게/지내이더니…중략」.
일제 압박하의 암흑상을 암시적으로 표현, 당시 우리네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던 눈물겨운 동요는 그의 민족사상을 대표적으로 나타낸다.
또 3·1운동으로 폐간당한 독립신문을 동료와 함께 등사판으로 지하신문을 발행, 아낙네의 빨래광주리속에 숨겨 손에서 손으로 전하다, 투옥된 사건은 그를 더욱 잊을 수 없는 일화로 전해진다.
전국 방씨의 일문은 약6만명. 성별 인구 순위로는 54위 정도이며 그 뿌리는 신라시대 당나라문화사절로 들어 온 월봉 방지에서부터 비롯된다.

<시조는 당서 귀화>
중국 하남인이었던 그는 신라 문무왕 9년(서기 669년) 당나라한림학사로서 당 고종의 명령으로 문화사절로 이 나라에 들어 온다.
당시 신라는 북쪽의 고구려및 백제와 빈번하게 충돌, 친당정책을 쓰면서 당의 문화를 수입하기에 열을 올린것이 그를 이 땅에 불러들인 계기가 됐다.
신라에 들어온 그는 설총과 더불어 동방유학과 예교의 진홍에 힘써오다 결국 이 땅에서 결혼하여 정착,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온양방씨는 도시조이후 중간대의 실기로 방지의 근손 온수군 방운을 1세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상주가 고향이었던 그는 고련초 왕건을 도와 2차 견훤(후백제)정벌에서 공을 세워 고려 광종때 상서좌복사의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왕은 만년의 그를 지금의 온양(당시의 지명은 온수)의 과안산에 살게 하고는 온수군으로 봉하고 이산의 이름을 배방산이라 고쳐 부르도록 까지했다.
그로부터 방씨는 온양을 세거지로 삼아 살게 되면서 도시단의 아들 방헌주이후 관향으로 삼아오던 상주가 온양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방운이후 후손들은 선대의 후광에 힘입어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길에 해질 날이 없었던 명문으로 등장한다.
후손들은 특히 무예에도 뛰어나 온수군의 손자 방휴는 고려 현종9년 (서기1018년) 거란의 장수 蕭排押(소배압)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침임, 당시 강감찬장군과 함께 대파시킨 귀주대첩의 승리를 이룩한 맹장으로 빚났고 공민왕산년(서기136l년) 홍건적의 침입때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1등공신으로 올랐던 방절등 숱한 맹장들이 나왔다.
또 숙종때 문하생 평장사와 문하시낭에 올랐던 6세손 방유와 희종때 상서령과 상서낭생 찬성을 지냈던 11세손 방만두등은 명재상으로 당대를 휘어잡던 인물들이었다.
또 방씨는 당시 중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 13세손 방신고는 충렬왕때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간장사등 요직을 지내고 그후 충선-충숙왕대에 걸쳐 원나라를 왕래하며 대원외교에 공헌한 외교가이기도했다.
그의 아우 방신제도 충렬왕때 원나라에 들에가 그곳에서 금자광녹대부 평장쟁라는 큰벼슬을 지냈고 그곳에서 귀화,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번창해오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이조초기 여조의 영화속에 가문의 번성을 이룩해온 방씨가는 이조에 화합하기를 거역, 한때 화룰 입기도 한다.
여조 절신 방순은 공민왕때 판전교사사를 지낸 인물로 이조가 들어서면서 이태조가 비조상의의 벼슬자리를 남겨두고 여러차례 부르나 끝까지 「두임금을 섬기지않는」불사이군의 굳은 절개를 지켜 후손에 그 정신을 길이 전한다.
또 15세손 방유정역시 이태조의부름에 응하지 않자 이태조는 고려 광종이 방씨가에 내린 온양의 사패지 (나라에서내려준 땅)를 몰수하는 한편 방씨일문의 혼이 담긴 배방산을 방씨를 배척한다는 뜻에서 배방산으로 고쳐부르게 하는등 화의 역사가 시작된다.

<불사이군 충절지켜>
그후 숙종에 이르러「방」자위에「입」를 붙여 배방으로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조에서 방씨가는 14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했으나 여조이후 이조에서 최초로 문과에 급제한 17세손 방강을 비롯해 18세손 방련등 초기 급제자들이 정유재란때 절개를 지키다 유배를 당하는등 빛을 보지 못해 큰 벼슬길에 오른 인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뛰어난 무장들을 많이 배출, 정조-순조때의 방우정은 홍경내난때 정주땅을 함락시킨 명장으로 그가 홍경내난의 평정에 참가했을 때 쓴 「서정일기」 는 그 방면의 귀중한 연구자료로 쓰인다.
또 이순신장군이 바로 방씨일문의 사위로 임진왜란때 이충무공의 처숙뻘되던 방덕룡을 비롯 방응원등 방씨가의 명장들이 이충무공의 선봉장으로 노량진 해전에서 함께 싸우다 전사를 하기도 했다.
방씨일문은 근세에서 특히 많은 인물을 배출, 민족독립운동의 제단에 정기를 바친 방경호·방창근·방성도·방린근씨(현존)등이 유명하고 6 ·25때 납북된 전조선일보사장이었던 방응모씨등이 돋보인다.
그는 1932년 운영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거액을 투자, 인수 운영해오다 l940년8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폐간되자 출판사인「조광사」 를 경영하기도했다.
그후 8·15광복과 동시에 조선일보를 복간, 민족언론의 창달에 노력해 오다 1950년 납북되었다.
현재 조선일보 방일영회장·방우영사장은 바로 그의 손자.
또 사법계의 거성으로 대법원관사를 지내다 지금은 변호사를 개업하고있는 방순원씨가 유명하다. 독립운동가 방린근씨는 그의 친형.
작고한 작가 방인상씨도 일문이다.
이밖에도 정계·재계·학계·예술계등에서 화약중인 인물은 다 손 꼽을 수 없다.

<저명인사>
▲방양식 (화수회회장·양지건축사장) ▲방영진 (서울방소아과원장·의학박사) ▲방준(경희대교수) ▲방진동 (경희대교수) ▲방숙 (순천양의대교수) ▲방진문 (서울영동전신전화국장) ▲방효진 (화수회상무이사) ▲방진원 (용진향교집사) ▲방남수 (부산진광고이사장) ▲방만영(전국회의원) ▲방성출(전국회의원) ▲방상교 (전충남홍성군수) ▲방효선 (한국건업실업주식회사 상무이사) ▲방동령 (총경·치안본부근무) ▲방인원 (춘천지검사무국장) ▲방원진 (대구경찰국수사과장) ▲방희 (대한광업회회장) ▲방해자(여류화가) ▲방락진 (재미교수) ▲방준명(작가) ▲방조영 (소설가) (화수회제공·무순) 글=임춘홍기자 사진=주홍민기자
경남 합천군봉산면저포1구. 해인사에거 거창으로 가는길을 9km쯤, 가파른 길을 한참 숨가쁘게 오르다 「휘여」 한숨을 몰아쉬는 깨꼭재에서 발길을 왼쪽으로 돌려 황강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듯 13km쫌 달려 이마을에 이른다.
좁다란 외다리를 건너 잡힐듯 눈앞에 우뚝 선 와룡산을 파고 들면 숱한 인고의 역사를 피해 숨어 살아온듯한 오목한 곳에 방씨 한성받이 마을을 만난다.
푸르다못해 검은 빛이 날 정도로 짙은 밤나무·감나무숲이 마을을 뒤덮어 한껏 평화스럽다.
방씨일문이 이 마을을 지키고 산것은 지금부터 3백여년전.
27세손 이원이 땅을 찾아 들어와 살면서부터 비롯된다.
이후 지금까지 12대를 이어 내려오며 32∼38세손까지 7대 57가구가 오순도순 어울려 산다.
타성받이라고는 기씨2, 홍씨1, 여씨l가구등 5가구뿐.
『이 마을에서 큰 인물이 난적은 아직 없심니더만 그렇게 어렵게 살지는 않심니더.』
이 마을 화수회장 방유복씨 (69·34세손) 는 그 이유가『마을이 풍수지리설로 따져 큰 터가 못 돼서 그렇다』 며 껄껄 웃는다.
『한 60년 됐을까, 그에 한창 신학문의 바람이 불 때 마을 어른들이 머리 깎고 학교가는 것을 결사반대 했답니더. 그러니 제대로 큰인물이 못났지요.』
옛날에 마을에 모시를 많이 심어 모시 「저」 자를 따 저포리라고 했지만 주민들은 한때 왕골 돗자리를 만들어 재미를 봐 왔으나 최근들어서는 젊은 사람들이 죄다 도시로 나가고 일손이 달려서 수지가 안 맞아, 그만 두었단다. 『마을 농토는 논 5백30마지기, 밭 3백마지기가 겨우지요.』
그리나 이들은 이 마저도 이제 버리고 3백년이 상을 지켜온 고향을 떠나 게 되리라고 한다.
마을아래 낙동강쪽인 대전면상천l구에 대천댐이 오는 86년까지 들어서게 돼 이마을이 댐수물예정지구로 계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옛 어른들 얘기로는 가유산 줄기가 남으로 뻗다가 마을앞에서 용이 누우것처럼 자락을 감아 마을이 없어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도 거짓말인것 같습니더.』
그러나 이들 방씨일가는 무엇보다 이마을의 시조격인 이원의 재실이 없어지게 된 것을 더욱 안타까와하고 있다.

<가까이서 멀리서>식민주의의 깊은 뿌리
어째서 일본교과서문제와 함께 그러한 국제뉴스를 연관시키느냐 하고 궁금한 얼굴을 하실분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보도를 보면서 과거의 식민주의가 뿌린 씨앗이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아직도 우리 세대에 영향을 끼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본 것이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는 것이라고 함은 다들 알고 남음이 있는 것이고, 이스라엘국가의 건설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실향이란 비극도 서구식민주의가 남긴 유산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프리카의 경우는 제3세계라고 하는 말이 상징하듯이 서구 식민주의로부터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받은 나라들과 민중들의 사연이 깃들고 있는곳이다.
제3세계의 학자나 사상가들은 서구열강의 부와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제3세계의 식민화에 의한 수탈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 서인도의 「트리니다드토바고」수상이고 역사가인 「에리크·월리엄즈」 의『자본주의와 노예제도』 라는 저서가 그 한 예이기도 하다.
그러한 아프리카도 눈을 뜨고 제발로 서며 자기의 정당한 자리를 찾기위한 진통을 하기시작했고, 세계 나라들과 어깨를 겨루고 우리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 손을 잡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헤겔」 이 『나라가 없는 민족은 역사가 없다』 고 하는 말을 했지만, 그 본래의 뜻이 어떠하든 그 말만으로 따져봐도 아프리카에는 역사가 없다고 식민주의자는 말해왔고 우리에게도 아프리카 역사에 관한 우리 학자 손으로 된 책은 한권도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프리카에 역사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해지고 있고, 사실도 그러하리라고 본다.
여기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를 봐도 나라가 없으면 역사가 없게 되고, 나라가 바로 서지 못하면 제 역사도 빼앗긴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배우고 있는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사실 개인이 공동사회에서 살게된 이래 자기가 속하는 집단과 그의 운명을 함께 해왔다고 하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지금도 아무리 인류 동포주의나 국제주의를 말해도 나라없이 어느 곳에서 발붙이고 살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이 문제는 분명해지리라고 본다.
그런데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를 통해서 생각하게 되는 일은 일본제국주의가 서방의「백색」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의 정당화를 위한 신화를 어쩌면 그렇게 같게「황색」제국주의로서 변조·이식해서 뿌리를 박아놓았는가 하는 점이다. 식민주의자는 식민 통치를 위한 하나의 신화를 갖는다. 미개한 백성이고 신의 복음을 모르는 이교도를 문명·개화시키고, 그 영혼을 구제한다고 하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그들「문명인」 이고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의 짐(부담)이고,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고, 또 그러한 발상에는 식민지 사람은 애당초 「열등인종」 이라고 하는 편견이 깃들어 있었다.
물론 그러한 허구적인 얘기를 믿지 앉는다고 하겠지만, 그들이 뿌려놓은 씨앗은 아직도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도 하다. 일본제국주의도 한국민족은 자체적으로 근대화·개화를 이룩할수 있는 소지가 없으며, 당초부터 일본에 예속될 운명에 있었고, 그들이 멸시적으로 부른 한국인의 대명사인 「센진」 은 열등민에 대한 호칭으로 뒤바꿔 놓았다. 『센진(한국인)은 때려야한다』는 말을 생활속에 일상언어로 하고, 한국인의 열등의식과 자기비하의식을 의식적으로 조장해 온 것이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고등교육을 받고 혜택을 누린 사람일수록 한국민족은 일본인에게 뒤떨어진다고 하는 사회적 편견을 지니게 해놓았다. 이점은 일제식민통치의 성공 (?) 인지도 모르지만, 그들 자신에게도 마음의 병을 지니게 해놓은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지배자로서의 교만과 그릇된 우월감과 함께 제국시대에의 향수가 일본사회 자체를 병들게하고 있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지.
그들 가운데서 양식있는 사람들이 이점을 걱정하는 것을 많이 보아오고 있지만, 이른바 사회에서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나라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려고 한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로서는 솔직하게 걱정하고, 우리 자신도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다시 다짐하지 않을수 없다. 일본사람 개인이 밉다기 보다 식민주의의 신화에 물든 사람이나 그러한 풍조를 띠어가는 듯한 분위기가 문제라고 하는 점이다.
우리로서의 할일이 더 많고,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볼 일도 급하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한다. 물론 그렇다. 그렇다고 해도우리는 식민주의가 남긴 신화만큼은 그 뿌리를 뽑아야 하리라고 본다. 우리 스스로의 머리 속에서부터 뽑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래야만 재일동포가 떳떳한 마음고 자세를 지니고 사람대접을 받을수 있다. 또한 그래야만 일본사람도 우리를 바로 알게 되리라고 본다.
여기서 나는 학계나 언론계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러한 과제를 풀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 기념관」은 물론 일제침략과 민족사를 더욱 후손에게 알려야하고 그밖에 할일도 많겠으나 그 가운데서도 교과서왜곡문제 나왔으니 일본의 명이래 일본의 교과서에 나타난 한국민 및 한국인관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통적으로 분석하고 또한 그들이 이상으로 삼는 국가관과 이상적인 인간상을 연구 검토해야 하고 또 거꾸로 우리의 것도 마찬가지로 다시 연구해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지금 당장에 비분 강개하는 감상론에 그치거나 한때의 쟁점으로 정당한 조정으로 잊혀지고말 문제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경제대국으로 되고 지금은 명실상부한 국제적 지위를 굳혀가면서 과거의 위상이 되살아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우선 느낌으로 기분이 상하지만, 우리가 그 들을 바로 알고 우리가 할 바를 하는 뼈대있는 이론작업으로써 긴 장래를 내다보지 않으면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식민주의가 남긴 신화를 깨부숴 버리는 일이 중대하고 또 급한 일이라고 본다. g나상진<동국대교수·상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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