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도청 '핵폭풍'] 국정원 발표 내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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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 간부들이 5일 고개를 숙인 채 김만복 기조실장이 발표하는 불법 도청 실태조사 결과를 듣고 있다. 왼쪽부터 최준택 3차장, 서대원 1차장, 김승규 국정원장, 이상업 2차장이다. 김태성 기자

봇물이 터졌다. 거짓말의 둑은 진실의 봇물을 더 이상 막지 못했다. 의혹은 모두 사실이었다. 국정원의 고해성사는 정치권에 해일을 일으키고 있다. 국가기관이 파렴치하게 벌였던 범죄 사실들 앞에 국민은 경악했다. 군사정권 시절 불법 도청의 피해자를 자처해 온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가 도청의 가해자였다는 내용이기에 더 놀랍다. 김승규 국정원장은 5일 "백지에 국정원 역사를 새롭게 쓴다는 각오로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했다. "국민 앞에 용서를 구한다"고 사죄했다. '백지에 새로 쓰는 역사'. 이번에는 진실이기를 국민은 바라고 있다. 다음은 이날 국정원의 발표 요지.

98년 이후 감청장비 26세트 자체 개발
과거 정부의 불법 감청

▶군사정부=1961년 6월 중앙정보부 창설 후 20여 명 내외의 과(科) 수준에서 유선 감청기구가 운영되다 68년 5월 60여 명 내외의 단(團)으로 확대됐다. 중정은 필요에 따라 각계 인사를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불법적인 유선전화 감청을 실시했다.

▶문민정부=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 후에도 조직을 그대로 유지,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유선전화 불법 감청을 계속했다. 96년 1월 이탈리아에서 아날로그 휴대전화 감청장비를 4세트 도입해 99년 12월 아날로그 서비스가 중단될 때까지 불법 감청에 활용했다.

▶국민의 정부=디지털 휴대전화 감청장비 두 종류(유선 중계 통신망 감청장비 6세트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 20세트)를 자체 개발해 98년 5월~2002년 3월 불법 감청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안기부를 방문해 "도청.미행.고문 등을 반드시 없애라"고 했으나 불법 관행을 탈피하지 못했다.

▶불법 감청 중단 경위=2002년 3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과 함께 감청장비의 국회 신고가 의무화되는 등 절차가 강화되고, 16대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국정원 불법 감청 논란이 거세지면서 완전 중단했다. 2002년 3월 신건 원장의 결단으로 휴대전화 감청장비를 분해해 완전히 소각했다. 감청 자료는 95년 9월까지 일반녹음기의 릴 테이프에 저장했고, 이후엔 PC에 파일로 자동 저장했다. 릴테이프와 파일 모두 1개월 후 소각되거나 삭제돼 현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CDMA 감청장비 120회선까지 접속
휴대전화 감청기술 실태

90년대 초 아날로그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96년 1월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감청장비 4세트로 감청을 시작했다. 이 장비는 휴대전화 사용자 반경 200m 내에서 감청이 가능했다. 그러나 99년 12월 아날로그 서비스가 중단되면서 폐기했다. 96년부터 디지털 휴대전화가 상용화하면서 '유선중계 통신망 감청장비'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 등 두 종류를 자체 개발해 사용해 왔다. 유선중계 통신망 감청장비는 통신회사의 유선 회선에 감청장비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98년 5월부터 디지털(CDMA 방식) 휴대전화에 대한 불법 감청에 활용하다가 2002년 3월 폐기했다. 이 장비는 모두 6세트밖에 없어 당시 서울지역의 수만 개 회선 중에서 최대 120개 회선에만 접속할 수 있었다.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는 무게 45㎏ 정도로 차량에 싣고 휴대전화 사용자 200m 내에까지 접근해야 감청이 가능했다. 99년 12월 개발해 2000년 9월까지 9개월간 사용하다가 기술적인 한계로 중단했다. 2000년 9월부터 휴대전화 기술이 업그레이드된 CDMA-2000 방식을 쓰면서 기술을 따라가지 못해 2002년 3월 전량 폐기했다.

그동안 감청을 실시하면서도 휴대전화 감청 가능성을 부인한 것은 이 사실이 국민에게 알려질 경우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휴대전화 감청방법으로 복제 휴대전화가 원래 휴대전화와 20m 이내 거리에 있을 때 일시적으로 감청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2003년 10월 이후 이동통신 회사들의 시스템 개선으로 불가능해졌다.

정권 바뀔 즈음 해체 … 바뀌면 또 만들어
미림팀 구성.해체

▶1차 미림팀=미림팀은 중앙정보부 시절인 1960년대 중반부터 운영한 '여론조사팀'의 별칭으로 90년대 초까지 단편적인 정보수집 활동을 했다. 91년 7월 국내분야 차장이 미림팀 활동 강화를 결정하고 공운영씨에게 지시, 5명으로 1차 미림팀이 편성됐다. 정보 수집 대상은 주요 정치인과 그 측근들이었다. 92년 9월 담당 국장이 대선 이후를 대비해 활동 중단을 지시했고, 그해 대선 직후 사무실 캐비닛에 보관돼 온 40~50개의 도청 테이프를 청사 내에서 소각 처리했다. 93년 7월 조직 개편 때 1차 미림팀이 해체됐으며 모든 팀원은 내근 요원으로 전보됐다.

▶2차 미림팀=94년 2월 새로 부임한 국내정보 수집 담당국장이 공씨를 불러 미림팀 재구성을 지시, 3명의 2차 미림팀이 구성됐다. 이들은 협조자로부터 정.관.재계 및 언론계 인사의 예약 사항을 미리 파악해 불법 도청을 했다. 97년 대선 전 여당 내부 동향과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 및 이회창 전 총재 등 주요 인사의 동향이 주 대상이었다. 담당 국장의 지시로 97년 대선 직전 2차 미림팀의 활동이 중단됐고 98년 4월 정식 해체됐다.

5억 거절당하자 녹취록 박지원씨에
테이프 유출.유포

▶테이프 유출=공씨는 94년 다시 미림팀을 맡으며 도태될 때를 대비해 테이프를 방어수단으로 활용키로 결심, 94~97년 사이 274개의 테이프와 5권의 녹취록을 무단 반출한다. 99년 직권면직된 공씨는 그해 9월 L씨(국정원 전 직원)와 접촉, 도청 자료를 이용해 삼성으로부터 사업지원을 받기로 의논한다. 공씨는 L씨로부터 소개받은 박인회(구속)씨가 삼성과의 연결 가능성을 내비치자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의 대화가 담긴 테이프 1개와 녹취록 3건을 건넸다. 박씨는 공씨에게 돌려주기 전 이들을 복사해 보관했다.

▶유포 과정=박씨는 99년 9월 삼성 구조조정본부를 방문해 녹취록을 보이며 K이사에게 5억원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박씨는 L씨와 함께 당시 P 문화부 장관의 집무실을 찾아가 복직 청탁을 하며 삼성 관련 녹취록 3건을 전달했다. 이후 미국에 체류하던 박씨는 2004년 말 국내에 나왔다가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주미대사로 거론되는 보도를 보고 '테이프와 문건을 쓸 절호의 시기'라고 판단, MBC 이상호 기자에게 접근해 녹취록을 건넸다. 그해 12월 이 기자는 미국으로 건너가 박씨에게 테이프를 요구했고, 그 뒤 둘은 귀국해 박씨가 테이프를 이 기자에게 건넸다.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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