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미친 짓은 …꿈을 갖지 못한 것이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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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 뮤지컬 ‘돈키호테’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꿈을 담았다. 자신을 기사라고 믿었던 돈키호테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추한 몰골을 확인하고는 절망한다.

자칫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잘 생긴 꽃미남은 간 데 없고 미치광이 노인네가 주인공이다. 무대 세트가 휙휙 돌아가는 화려한 쇼를 바랐다면, 음침한 지하감옥이 실망스러울 것이다. 400년 전 소설을 소재로 했다니 왠지 곰팡내가 날 것 같다. 인내력 테스트하나? 쉬는 시간 없이 2시간20분을 내리 간단다.

뮤지컬 '돈키호테-라만차의 사나이'. 겉모습만 본다면 끌릴 게 없다. 몇 초 간격으로 웃겨대고, 볼거리가 쏟아지는 뮤지컬을 좋아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차분히, 느리게, 조용히 마음의 눈을 열고 무대를 바라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자신의 신념을 향해 창을 높이 드는 돈키호테의 기행을 따라가다 보면 '과연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올해로 마흔살, 토니상 5개 부문을 수상한 뮤지컬 '돈키호테'의 힘은 드라마에 있다. 우선, 지하감옥 한켠을 털어 해바라기 언덕과 아름다운 성당을 꾸민 무대가 빛난다. 그보다 가슴을 울리는 것은 눈앞의 현실보다 이상 쪽으로 한발 앞서 나간 인간이 던지는 묵중한 메시지-진정한 행복은 내 마음 속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다.

스페인의 어느 지하감옥. 종교재판을 앞둔 작가 세르반테스는 자신이 쓴 작품으로 죄수들과 함께 즉흥극을 벌인다. 주인공 돈키호테는 미친 노인네다. 자신이 악을 물리치는 기사라고 믿는다. 그의 눈에 길가의 여관집은 성(城)이요, 여관집 주인은 성의 영주님이시다. 떠돌이 이발사의 면도그릇은 전설의 황금투구가 되고, 술집 창녀 알돈자는 한없는 애정과 존경을 보낼 '레이디'다. 세상에 저주를 퍼붓던 알돈자가 돈키호테로 인해 삶에 눈 뜰 무렵 돈키호테는 자신의 비참한 몰골을 확인하며 죽음을 맞는다.

이 진지한 인생 대서사시에 슬픔만 있는 건 아니다. 돈키호테가 그를 유혹하는 집시들에게 "어허, 레이디들이 자선기금을 모으고 있구나"라며 돈을 건네고, 알돈자의 걸레를 비단인 양 머리에 쓰고 좋아하는 장면 등에선 주인공의 순수함과 엉뚱함이 묻어난다. 몸종인 산초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말투도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다만 중간중간 돈키호테의 어색한 대사처리는 극의 흐름을 끊어 아쉬웠다.

"너무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짓이오. 그 중 가장 미친 짓은 꿈을 갖지 못한 것이오!" 미친 노인네라는 주변의 손가락질에 돈키호테는 이렇게 소리친다. 그 메시지는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그대 꿈꾸고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돈키호테' 만큼이나 행복한 사람입니다. 2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김성기.류정한.강효성.이혜경 주연. 02-501-7888.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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