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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워시 회의와 비핵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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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7월 말 일본 히로시마에서 퍼그워시 회의 제55차 총회가 열렸다. 원폭 투하 60주년을 맞아 인류 최초의 '그라운드 제로'에 서서, 핵 없는 세계의 비전을 재확인하자는 취지로 히로시마가 10년 만에 또다시 개최지로 선정된 것이다. 필자도 일본 위원회의 초청으로 참가했다. 세계 40여 개국 170여 명이 참석해 5일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지난해 총회는 서울에서 개최된 바 있다.

▶ 이종원 일본 릿쿄대학 교수.국제정치

미.소가 치열하게 핵 군비 경쟁을 벌이던 냉전기에 퍼그워시 회의는 인류의 양심을 대변하면서 세계 여론을 움직인 큰 힘이었다. 1955년 "핵무기 없는 세계"를 제창한 '러셀 아인슈타인 선언'을 계기로, 이에 찬동하는 22명의 핵과학자가 57년 캐나다의 작은 마을 퍼그워시에 모여 국적을 초월한 대화를 시작한 것이 그 효시다. 핵 군축 활동의 공로로 95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핵 위협에 대한 세계적인 무관심 속에서, 퍼그워시 회의의 존재도 점차 빛을 잃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 발표된 '히로시마 선언'이 지적하듯 냉전 종결 이후 핵무기 철폐의 '역사적 기회'를 살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핵 보유국 증가, 소형 핵 개발, 핵 물질의 확산 등으로 핵 위협은 오히려 증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계적인 관심이 저하되고 있는 것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안타깝게도 이번 회의에 한국의 참가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유일한 피폭국' 일본에서조차 '히로시마'를 상징으로 하는 반핵 의식의 풍화는 뚜렷하다. 이번 퍼그워시 회의에 대해 일본의 주요 매스컴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회적 무관심은 '핵 알레르기'의 약화로 연결된다. 북핵과 납치 문제 이후 일본 사회에서 핵 보유 논의는 더 이상 정치적 금기가 아니다. 2002년 오자와 이치로, 아베 신조 등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이 잇따라 일본의 비핵 3원칙 수정과 핵 보유 가능성을 언급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이 핵 개발 비밀 계획을 갖고 있다"는 식의 음모설을 제창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문제는 북핵 문제를 계기로 동북아시아 지역에 잠재적 핵 개발 능력을 둘러싼 상호 불신이 증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퍼그워시 회의에서도 화제에 오른 문제지만, 올해 말부터 일본 아오모리현 록카쇼무라(六ヶ所村)의 핵 연료 재처리 공장이 시험 가동에 들어간다. 2007년 본격 가동이 시작되면 연간 8t의 플루토늄을 생산하게 되며, 이는 1000개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이다. 일본은 비핵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대규모 재처리 시설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유수의 플루토늄 보유국이다. 2003년 현재 일본은 40t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약 5t은 일본 국내에 보관돼 있다. 이 같은 플루토늄 보유는 물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엄격한 관리 아래 있으며, 국제법상으로는 합법적인 행위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핵 확산의 자극과 핵 물질 유출 등의 위험성이 따른다. 이 같은 관점에서 미국의 '우려하는 과학자연맹(UCS)'은 올해 5월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을 비롯한 27명의 전문가 명의로 록카쇼무라 재처리 시설의 가동 중지를 요청하는 서한을 공표했다.

한국은 91년의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따라 핵무기 개발은 물론 핵 재처리 시설 보유까지도 포기했다. 퍼그워시 회의와 같은 시기에 베이징(北京)에서는 6자회담이 열렸다. 북핵 해법의 한 기둥이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국제적 확인이라고도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핵 개발 및 핵 물질 생산의 투명성과 상호 신뢰를 위한 지역적인 비핵화의 틀 형성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때다. 주변 국가들 사이의 새로운 핵 군비 경쟁이나 핵 확산은 물론 우리의 위협이며, 또한 상대적 박탈감과 불평등감이 한국 안의 '핵 주권론'을 자극할 위험성도 상존하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두 '비핵 국가'인 한국과 일본이 유기적으로 연계된 '협조적 비핵 외교'를 기대해 본다. 지난해 한국의 핵 개발 의혹에의 대응 과정에서 나타난 것 같은 상호 불신은 시급히 극복돼야 한다.

이종원 일본 릿쿄대학 교수.국제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