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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같이 즐기고 모임 자연스럽게|주는 사람들 생색내는법 없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음산한 겨울은 4월중순 부활절을 맞아 봄으로 바뀐다. 이때부터 영국의 각 지방에는 「페이」 또는「페이트」라는 이름의 축제가 벌어진다. 이 축제는 마을단위로 거행될 뿐 아니라 학교·교회·자선단체 단위로도 열린다.
가장 행렬이 지나가고 마을 악대가 나팔을 불고 꼬마들이 나와 칼춤도 추면서 축제의 분위기를 돋우면 사람들은 긴 겨울밤의 동면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그런 소란 속을 거닐면서 맛보게된다.
영국의 봄 축제가 갖는 특징은 대부분의 그런 행사가 모금운용을 겸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 참가하는 모든 상행위에서 생기는 이익금이 모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놀이가 지원자들에 의해 유료로 행해지며 거기서 모인 돈도 전액 모금함으로 들어간다.
기자가 본 어느 학교의 축제에서는 한 어머니가 버너와 팬을 가져다 놓고 전을 구워 팔고 있었다. 5천원어치의 밀가루 반죽을 가져왔는데 한시간만에 모두 팔았다고 좋아했다. 거기서 나온 돈은 3만원 남짓했는데 이걸 모두 학교기금함에 기부했다. 『5천원을 주는 것보다 한시간 수고하고 그 6배를 줬으니 얼마나 이득이냐』고 그 학부모는 희색이 만면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한 중년 남자가 나무대 위에 낡은 사기 접시를 얹어놓고 야구공으로 그걸 깨뜨리는 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야구공 5개 던지는데 요금은 1백10원인데 인기가 대단했다. 이 학부모는 못쓰는 사기그릇 구하는 수고 하나만으로 이날 역시 1만원 남짓한 기부를할 수 있었다.
한 소녀는 자기 집 망아지를 끌고 와서 구경 나온 어린이를 태워주고 한번에 1백40원씩 받고 있었다. 어린이를 태우고 고삐를 잡고 50m를 데려 갔다가 돌아오는 놀이였다.
또 어떤 사람은 사이다 5병을 가지고 와서 한병씩 경품뽑기를 실시해서 돈을 모았다.
이런 식의 축제가 갖는 묘미는 수고하는 사람이나 즐기는 사람이 다같이 하나의 명분에 적극 기여한다는 만족감을 맛볼 수 있다는데 있다. 수영하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즐기는 사람도 돈을 내고 즐길수록 모금운동에 그만큼 기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놀이의 요금이 다른 놀이터보다 오히려 싸고 파는 물건도 모두 기부로 들어온 물건이기 때문에 상점에서 보다 싸다.
그래서 이런 축제에서는 어느 쪽도 생색을 낼 여지가 없이 다같이 즐기고 모금은 모금대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자가 참석한 어느 불구자 요양소의 축제에서 이런 특성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이런 식으로 자선이 이루어지니까 주인공이 자선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선 받는 불행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 목발을 짚은 사람, 허약해서 간호원의 부축을 받는 사람 등이 모두 축제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이들을 어느 특정장소에 몰아 세워 놓고 전시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 참가객들 사이에 섞여 정상적인 참여자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선을 떠들어대는 VIP의 연설이나 수혜자대표의 답사같은 것도 없었다.
자선을 베푸는 「자상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 또 불행한 사람의 불행이 두드러지게 전시되지 않는 그런 자선축제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깊은 감명을 줬다.
자선행위를 냉소적으로 보는 사람은 자선이란 자선하는 사람이 배설하는 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 사이를 유기적인 전체로 본다면 그런 죄의식은 모든 「덜 불행한 사람」이 아주 불행한 사람들에 대해 다같이 품고 있을 법하다.
이런 생각에 수긍이 간다면 영국에서의 자선축제는 큰 죄의식은 아니더라도 조그만 죄의식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능력이 모자라 자선을 못하는 일반 서민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이런 것을 두고 자선행위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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