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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계사의 쟁점|양국학계, 무엇을 어떻게 보나|백제와이 하사한 한 칼을 "헌상"으로 왜곡|삼국문화의 동류와 일국보 칠지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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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고구려·백제·신라의 문화가 일본에 전파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므로 우리는 이들의 개개적인 요소들을 열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일본에는 삼국시대 이전에도 우리나라의 주민과 문화가 대거 흘러들어 갔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문화가 또 다시 일본에 간 것은 당시의역사적인 대세로는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예를 들어서 일본의 책동기문화인 야요이(미생)문화가 한국의 천동기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일본 안에서 발견되는 유적·유물에는 우리나라의 청동기 유물을 비롯한 삼국시대의 문화가 적지 앉게 눈에 띄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찌기 일인들은 한국을 강점하면서 한·일 두 나라에서 유사한 유적과 유물이 나오면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것은 일본문화의 영향 인 듯이 서술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한우도에서 특이한 금속유물이 보이면 이것은 예의 없이 중국문화의 영향이거나 소산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학풍 속에서 일인들은 문헌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한국에서 주요문화가 일본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주된 흐름을 구성하는 요인들은 무시하고 일본에서 발견되는 비 한국적인 요소에다 눈을 들리곤 했다.
그나마 일인들이 한국의 고대문화를 직시하면서 일본과의 연결을 시도하기 시작한 시기는 일본이 2차 대전을 패전으로 맞으면서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본의 고대국가와 그 시기의 지도층이 일본에서 스스로 탄생한 듯이 모든 역사가 서술되던 시기에 강상파부는 일본의 고대국가와 지배자들은 대륙으로부터 한우도를 경유해서 들어온 기마 민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놀라운 견해를 발표했다.
이 견해는 아직도 논란이 있거니와 이러한 세이 나타날 수 있었던 배경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헌에 보이는 주요인물의 일본도래, 문화의 전파, 고고학적 유물의 발견이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인의 종래 해석만으로는 합당한 실명이 불가능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고대문화가 특히 청동기문화 이래로 삼국의 기술, 불재문화가 일본에 전파되던 그 많은 역사적인 사실은 도저히 역사에서 숨길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인들은 주요문화가 한우도에서 건너갔다는 사실을 「대륙」에서 왔다는 모호한 말로기술하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의도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잘 아는 백제의 왕인, 아직기는 일본에 문물을 전해준 유명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기록이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사인 것처럼 잘못 알고 있다. 이러한 기사는 우리 나라측의 문헌에는 없고 오히려 일본의「일본서기」나 「고사기」 등에서 나타나고있다. 일본에 불상과 경론 등을 전한 노리사치계나 치금술을 건한 침반박사 등도 모두「일본서기」 등에서나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의 고대문헌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나라측의 인물들이 매우 많이 등장한다. 따라서 한·일고대사에서 주요문화의 흐름이 어떤 성격인가를 일별한다면 참된 역사의 실상을 올바르게 부각시키는 일이 어렵지 않음을 자료들이 임증하고 있다. 삼국의 문화가 동류 하였다는 입장에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칠지도의 논란이다.
이 칠지도는 광개토왕 비문과 마찬가지로 한·일고대사에서 커다란 논의가 계속되어봤던 유물이다. 석상압궁에 보관된 이 칠지도는 중심부와 양쪽에 각각 세 개의 가지가 있는 특이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칠지도가 지니고 있는 사료적인 가치는 외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중심부의 전 후면에 새겨진 60자의 명문으로 유명하다. 논란이 계속된 문제의 발단은 이 명문을 어떻게 해석하며, 또한 역사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데 초점이 있었다.
처음부터 이 칠지도를 취급하여온 일제 관학자들은 이 유물이 백제왕이 왜 왕한테 헌상한 칼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일본서기」 의 기사와 연결시키려고 시도를 하였다. 「일본서기」『압공황후기』에는 백제의 사신이 칠지도·칠자경 등을 일본에 바쳤다는 기사가 있다. 바로 이 기록을 맹신하던 초기의 관학자 관정우·성야항들은 칠지도를 문헌 속에 나오는 기사와 일치한다고 주장했고 그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르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점은 「일본서기」 의 초기부분 기사가 신빙성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찌기 관정우가 기년 비판론을 국체의 존엄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데서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기록을 칠지도와 질제로 연관된다고 보는 것은, 그리고 백제가 왜 왕한테 칠지도를 헌상한 것이라는 주장은 그들이 한우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련의 연구와 맥락을 같이한다.
여기에 명문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전면)
태화사년 오월십육일 병오정양조백련광칠지도 생군백병 선공공후왕○○○작
(후면)
선세이내 말유차도 백자왕세○ 기생성음 고위왜왕지조 전시후세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명문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연호의 해독이 문제가 된다.
초기에는 태시, 태초 등으로 갈리는 견해가 있었으나 지금에는 수산민남이 주장하는 동진의 태화4년 (369)으로 일반화해서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진희씨는 북위의 태화4년(480)을 주장하고있다.
우리는 연호의 판독이 우선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보는데 이의가 없지만 이를 「일본서기」에 나오는 칠지도와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것은 칠지도 명문에 보이는 내용이 무엇보다도 전후의 사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면에 보이는 글은 일반적인 내용을 적은 것으로 대체적인 내용은 백년전 칠지도를 만들었는바 이것은 백병을 물리칠만하므로 후왕에게 줄만하다는 뜻이다. 후면에는 이 칼의 내력이나 성격이 잘 나타나있다. 여기서 보이는『선세이내 말유차도』라는 문구에서 보듯이 그 당시 왜는 이러한 종류의 칼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고있다.
이것은 너무나 명명백백한 귀절이므로 지난날 일인들이「일본서기」등을 내세워 이 칼을 백제왕이 왜 왕한테 헌납한 것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 해석인가를 곧바로 느끼게 된다. 그 다음 구절들은 많은 견해가 있다. 다만 마지막에 보이는「전시후세」하라는 내용에서 보아도 이것은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려주는 성격의 물건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후세에 전해서 보이라』는 이 말은 우리나라측이 왜한테 칼을 헌상하면서 표현할 수 있는 성격의 귀절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백제가 헌상한 것이 아니라 왜한테 하사한 것이라는 세이 나오게 되었다. 칠지도의 헌상세 하사세은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하사하였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하여도 백제왕이 왜왕한테 이 칼을 보내준 것은 아주 확실하다.
연구의 방향이 이렇게 흐르게 되자 율원붕신은 이제 이 칼은 동진에서 만들어졌거나, 또는 백제에서 만들어졌어도 동진의 지령에 의해서 이 칼이 왜왕에게 전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를 발표하게 되었다. 우리가 명문의 해석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칠지도의 이해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과거 일인들이 광개토왕 비문과 마찬가지로 이 칠지도의 명문도 임나경영을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복잡성을 띠었던 것이다.
백제가 기원후 4∼5세기경에는 국력이 강하여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밀고 들어가서 고국원왕까지 전사시킨 그러한 시기였다. 그러므로 삼국의 형세를 참고해 보면 그 당시 백제가 왜왕한테 칠지도를 헌상하는 정세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나라의「삼국사기」를 본다면 쉽게 알게 된다. 이리한 관점에서도 칠지도는 종래 일인들이 뿌리깊게 지니고 있던 황국사관 때문에 엉뚱한 방향에서 연구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칠지도의 명문자체 만으로도, 그리고 우리나라측의 역사기록의 정황으로도 이것은 백제가 왜왕한데 전해준 물건이며 의식용의 기구였다. ,
이 명문 속에 길양어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명문의 해석이나 그 뜻이 다른 국면을 맞게 되지는 않는다.
이제 일인 학자중에는 이 칠지도를 올바르게 보려는 사람들도 있으며 백제의 문물이 왜한테 건너갔던 많은 역사적인 예에 따라 이것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불오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으나 이는 앞으로 연구가 더 진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로부터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앉았다고 논리를 펴기보다는 문화가 흘러 들어간 순리대로 칠지도를 보는 입장을 일인들이 갖는 것은 일본의 역사를 위해서도 아주 현명한 태도라고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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