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EU도 돈 풀기 경쟁 … 고민 깊어진 이주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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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eflation)의 공포’가 고개를 들자 세계 각국 중앙은행이 다시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추가 양적완화(QE)에 나선 일본에 이어 중국과 유럽 중앙은행도 돈 풀기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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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회복되는 듯했던 유로존 경기는 최근 다시 식으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대로 주저앉았다. 중국의 생산자물가도 32개월 연속 하락했다. 중국 인민은행이 22일 기준금리를 2년4개월 만에 전격 인하한 건 이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ECB)도 발을 맞춘 듯 움직였다. ECB는 21일(현지시간) 트위터 등을 통해 자산유동화증권(ABS) 매입에 나선다고 밝혔다.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이날 독일 프랑크푸르트 연설에서 “가능한 한 이른 시간 안에 인플레이션과 기대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리기 위한 새로운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면적인 양적완화 조치가 임박한 것으로 시장은 풀이했다.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 익숙한 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 방어의 최전선에 나서게 한 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다. Fed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 경제가 디플레이션 늪에 빠져들어가려 하자 즉각 행동에 나섰다. 금리를 0% 수준으로 낮춰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자 세 차례에 걸쳐 3조6000억 달러를 직접 시장에 푸는 양적완화 카드를 썼다. 과감하면서도 일관된 Fed 정책 덕에 미국은 선진국 중 가장 먼저 금융위기 악몽에서 벗어나며 양적완화 정책도 졸업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이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나 자산 거품을 유발하지 않은 데다 미국 경제가 유럽이나 일본보다 낫다는 점에서 Fed의 정책은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이후 디플레이션 조짐이 불거질 때마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이 전면에 나섰다.

 일본은 이미 행동에 돌입했다. 일본은행은 지난달 연간 자산매입 규모를 80조 엔으로 늘리는 추가 부양책을 깜짝 발표했다. 지난해 4월 무제한 양적완화에 돌입한 뒤 규모를 늘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는 내년 10월로 예정했던 소비세 추가 인상 계획도 사실상 철회하기로 했다. 여기에 ECB와 중국도 화답한 형국이어서 양적완화를 먼저 종료한 Fed도 금리 인상 시기를 되도록 늦춰 보조를 맞출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리 씨티그룹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1일 낸 보고서에서 “Fed가 내년 12월까지는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이 먼저 금리 인상에 나서면 달러화 값이 급등해 자칫 살아나던 미국 수출 경기에 찬물을 끼얹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선물에 시장은 환호했다. 중국과 유럽 중앙은행의 통화 완화 움직임에 21일(현지시간) 뉴욕 다우 지수와 S&P 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유럽 주요 증시도 일제히 올랐다. WSJ는 “같은 날 두 은행이 마치 쌍둥이처럼 경제성장을 위한 마중물을 다시 부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세계 각국 중앙은행이 이번 전투에서도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통화 완화는 장기적인 처방이 될 수 없어서다. 각국이 직면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반짝 효과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근본적인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일시적으로 고통을 완화하는 ‘모르핀 효과’만 낳을 수 있다.

대공황 시기 중앙은행의 잘못을 다룬 책 『금융의 제왕』의 저자인 리아콰트 아메드는 WSJ와의 인터뷰에서 “중앙은행은 할 수 있는 만큼 다했다”고 말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정부의 개혁 추진과 재정 정책이라는 설명이다. 일본은 비효율적인 국내 경제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고 유럽은 파편화하고 취약한 은행 시스템이 약점이다. 각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의 성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미국 정책을 답습해 값싼 신용을 대규모로 투입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그는 경고했다. 덧붙여 “전 세계가 지나치게 중앙은행에 의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독일의 반대 속에 추진되는 ECB의 양적완화 정책에 대한 우려도 크다. 로이터통신은 “유로존 노동과 서비스 시장의 경직성 등 구조적인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ECB가 돈을 푼다고 해도 부진한 경기를 끌어올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번 고용한 근로자는 해고가 거의 불가능한 노동시장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봐야 기업이 투자에 나서기 어렵다는 얘기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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