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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레드 차이나'와 경제안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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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요사이 미국에서는 '레드 차이나(Red China)'라는 말이 다시 유행이다. 그냥 중국이 아니라 공산주의 중국이라는 뜻이다. 한동안 메이드 인 차이나의 값싼 물건에 둘러싸여 '자본주의 중국'을 당연시했던 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발단은 중국해양석유가 미국 9위의 석유.천연가스 회사인 유노칼을 185억 달러에 사들이는 작업을 추진하면서부터다. 중국 정부가 70%의 지분을 가진 사실상의 중국 국영기업이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미국에너지 산업에 진출을 시도하자 국민 여론이 동요했다. 미 상.하원은 각종 결의안과 법안을 내놓고 인수 작업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동시에, 국가에너지정책에 대한 장기 대책 마련을 위해 에너지 법안 개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원래 미국은 자유 시장경제와 외국의 투자에 매우 개방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단 하나의 예외가 바로 국가 안보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천문학적인 자금, 기술, 인력을 투자해 얻어낸 국방 관련 물자와 기술이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우려했다. 고심 끝에 국방물자와 관련 있는 미국 회사를 외국인(기업)이 인수하는 것을 금지, 제한할 수 있는 국방물자법을 1950년에 제정했으며 75년에는 외국투자위원회를 구축했다.

이 위원회는 88년에 제임스 액슨 상원의원과 제임스 플로리아 하원의원이 무역법 수정안을 제안하면서 한층 보강돼 외국인(기업)의 수출, 인수합병, 적대적 인수 과정에 위원회가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유노칼 인수 건도 이 위원회가 승인 여부를 가릴 것이다.

위원회의 심사기준은 인수대상이 된 미국 기업이 국방력에 필요한 인적자원.상품.기술.재료의 공급망 및 서비스와 관련된 국내 산업인지, 국방 우주에 관련된 사업인지, 합병이나 매각으로 인해 미국이 기술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는지를 평가한다. 또한 인수합병을 시도하는 외국의 주체에 외국 정부가 포함돼 있는지, 그 국가가 테러리즘을 지원하거나 생화학무기를 확산시키는지를 검토한다. 현상뿐만 아니라 가능성이 있을 때에도 위원회가 인수합병을 거부할 수 있다.

위원회의 대표는 재무부 장관이며 주요 행정부처의 수장에서 검찰청장.무역대표부 대표.예산처장까지 그야말로 범 부처 성격을 지닌 조직이다.연간 수백 건의 계약이 자발적으로 위원회에 접수되고 대부분은 승인된다. 그러나 위원회가 최초로 승인을 거부한 90년 중국 국영 우주산업수출입회사의 미국 MAMCO 인수 시도처럼 명백한 단서가 드러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 중국은 제10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면서 더 빨리, 더 손쉽게 기술우위를 장악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맹점을 집중공략하고 있다. 미국.유럽 등지에서는 적지않게 고전하고 있는 중국의 인수합병 전략이 유독 한국에서만 만개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공교롭게도 액슨 상원의원은 중국해양석유가 유노칼 인수를 공개 발표한 지난 6월 타계했다. 그가 수십 년 앞을 내다보고 만일에 있을 위협에 대비하는 법 제도를 구축한 덕분에 미국은 시장경제 메커니즘 속에서도 국익을 보호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를 가질 수 있었다.

한때는 외국기업의 무조건적인 투자 유치와 인수합병이 미덕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산업.기술.인적자원은 무엇인지 국가적 차원에서 분별력을 되찾아야 할 때다. 글로벌 경제의 파고에서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국자본의 유입에 대한 보다 엄격한 기준과 법.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