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YMCA의 60년 모금활동|기업체들 찾아 설명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어 록펠러재단에 호소 천만불 지원 받아|박「에스터」씨가 앞장…회관 완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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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울 YWCA 건물을 위한 모금의 일환으로 미국대사관저에서 있었던 「국제축연」이 대성황을 이루어 회관 건립의 앞날이 밝을 것을 점쳐준 것 같았다. 그러나 수천만원의 거금을 순전히 모금으로 충당해야 했으니 이만저만한 큰 작업이 아니었다.
모금이란 그 어느 때고 자존심은 접어놓고 하는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더우기 그때는 재건 중에 모두 다 어려운 때였다. 이해 역시 부족했기 때문에 모금은 더욱 더 어려웠다. YWCA가 무엇을 하는 단체며 어떠한 곳이라는 것이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여서 순수한 교회라거나, 교육기관이라거나, 자선단체도 아닌 이 단체의 건물을 위해 선뜻 돈을 내놓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도 난민구호사업을 해야하고 전란때 파괴된 건물을 복구해야 하는 일이 많은 이때 모금 위원들의 모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은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YWCA는 청소년들과 여성들에게 원만한 인격의 형성을 위한 기회를 마련하고 좋은 시민과 지도자가 되로록 도와주는 곳입니다』 박 「에스터」씨와 최이권 회장은 여러 기업체를 찾아다녀 보았으나 예상했던 것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 비교적 큰 액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그것은 정부의 허락을 얻어 영화관 입장료를 몇% 더 받아 그 덧붙인 만큼의 수입을 우리에게 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역시 상당한 고충이 따랐다. 극장협회장을 만나 모욕을 받은 일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고 공공단체를 위한 일이니 참을 수 있었다. 또 기도의 힘이 아니었으면 못했을 것이라고 박 「에스터」씨는 늘 말한다.
『하느님, 저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회관을 원하는 저희들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주시옵소서』라고 우리는 계속 기도했다.
58년 6월에 건축가 김재철씨의 설계로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박「에스터」씨는 돈의 모금을 위해 미국에 가 그의 친구 「메어리·록펠러」여사를 찾았다. 「메어리·록폘러」는 「넬슨·록폘러」의 부인. 미국YWCA의 회원이며 중요한 지도자의 한사람이다. 그는 한국을 몇번 방문했고 필자는 세계대회에서 만났을 때 그 겸손한 태도에 머리를 숙인 적도 있었다. 박 「에스터」씨가 그에게 사정이야기를 하니 「록폘러」가에서 만든 재단에 그를 소개했다. 편지나 명함으로 소개한 것이 아니라 직접 인도했다.
사무를 담당한 젊은 여자직원은 여러가지를 묻는 것이었다. 서울 Y에 대한 것, 회관 건축에 대한 상세한 계획 등을 질문했으며 만족할만한 답변이었던지 질문할 때의 엄격한 태도와는 달리 만면에 웃음을 띠며 5만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박 「에스터」씨의 감격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옆에 있던 「메어리·록펠러」여사도 너무 감격해서 그에게 뛰어와 얼싸안고 「축하해요, 「에스터」라고 말하며 같이 기삐해주었다.
백번 수모를 당하고 내놓았던 손이 부끄러울 정도로 거절당했어도 이 한번의 감격은 그 모든 어렵고 속상한 일을 씻어 주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용기있게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리라.
「록폘러」여사 외에도 당시 국제부 위원장인 「엘리자베드·모」여사가 유명한 건축설계사를 소개해줌으로써 건축비 절약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길로 돌아온 박 「에스터」씨는 회관을 완공시켰으나 아직도 빚이 2만5천달러나 되니 이에 대해 자나 깨나 그것마저 갚게 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회관은 59년 완공되었으나 그동안 3∼4년간 물심양면으로 과로한 박「에스터」씨는 결국 황달로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두달 동안 치료를 받은 후 하와이에 가서 6개월간 휴양해야만 했다.
휴양을 끝내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뉴욕으로 갔다. 또다시 국제부(국제부는 그의 본가나 마찬가지다. 국제부 직원으로서 한국에 파견된 것이었으니까) 위원장 「메어리· 록폘러」여사를 만나 회관 건립에 대한 경과보고를 겸해 아직도 빚이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박「에스터」씨의 말은 호소력이 있고 논리적이어서 누구도 그의 말을 들으면 도와주게 된다. 「메어리·록펠러」는 그를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도 있지만 꼭 필요한 도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머지 2만5천달러를 자기가 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할만큼 놀랐다.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의 가슴이 뛰는 것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계속>^^<사진>서울 Y회관 건립에 거금을 희사한 「메어리·록펠러」여사. 63년 방한때 Y임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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