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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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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002년 세워진 서울 정동의 러시아 대사관은 공사기간만 3년이 걸렸다. 골조 공사를 맡은 삼성물산은 혀를 내둘렀다. 러시아에서 파견된 보안요원이 시멘트 버무리는 것까지 옆에서 감시할 정도였다. 내부 전파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갑까지 둘렀다는 후문이다.

미국 첩보당국은 이처럼 두려운 존재다. 국익을 위한 첩보 전쟁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다. 워싱턴의 러시아 대사관 지하에 도청용 비밀 땅굴을 파고, 러시아 대사관 비둘기 가슴에다 송수신 장치를 심는 수술까지 했다. 중국 국가주석의 보잉 전용기 곳곳에도 스파이 장비를 심어 말썽을 빚었다. 그러나 미국도 국내 민간인에 대한 도청은 엄격히 제한한다.

옛 안기부의 도.감청 능력은 1994년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핵 위기와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내부 동향을 정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최첨단 도.감청 장비들이 속속 반입됐다. 다음은 박관용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98년 도쿄 특파원들에게 전한 일화다.

그는 94년 7월 9일 낮 12시 김덕 안기부장과 청와대 자신의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북한 중앙방송이 예고한 중대방송을 들어본 뒤 점심이나 같이 할 요량이었다. "30초쯤 지났을까. 문 밖의 안기부장 수행비서가 달려와 '김일성이 죽었다!'고 외치더라고. 김 부장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 방송에 나올 때까지 34시간이나 김일성 사망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할 말 없지. 첨단 장비 수입에 쏟아부은 돈이 아깝더라고."

정작 첨단 도청 장비의 파편에 뒤통수를 맞은 것은 박 실장 자신이었다. 그는 아직도 "YS의 정치사찰 금지로 한동안 안기부가 위축돼 제대로 일도 못했다"며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그러나 도청 사건 관련자들은 한결같이 "박 실장이 고교 동창생과 밥을 먹다가 YS 아들인 김현철의 전횡을 씹은 게 도청에 걸려 낙마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휴전선에서 북한을 향해야 할 첨단 도청 장비가 엉뚱하게 식당 밥상머리에 꽂힌 셈이다. 지난 주말 안기부 미림팀장 집에서 274개의 불법 도청 테이프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북한 첩보에는 먹통이던 안기부가 국내 도청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꼴이다. 국가정보원이 어떤 해명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