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도청 '핵폭풍'] 검찰 "수사하되 내용 절대 비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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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동포 박인회씨(가운데)가 29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있다. 최승식 기자

▶ 이종백 서울중앙지검장(가운데)이 29일 오후 압수한 불법 도청 테이프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검찰총장실로 가고 있다. 최승식 기자

안기부 비밀 도청 조직인 미림팀장 공운영씨가 불법 도청 테이프 274개와 녹취 보고서 13권을 보관해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과거 정보기관이 일반인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불법 도청을 자행했다는 명백한 증거로, 검찰의 전면 수사가 불가피해 진 것이다.

"대통령을 빼놓고는 모두 도청했다고 보면 된다"(공운영), "국가에 큰 화를 끼칠 수 있는 내용이다. 엄청난 폭발력에 소름이 끼쳤다"(이건모 전 국정원 감찰실장)는 주장을 고려할 때 테이프 등에는 사회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핵폭탄급'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면서 테이프 내용 등이 공개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 "테이프 내용 공개는 실정법 위반"=일부 법조계 인사와 시민단체들은 '국민의 알권리'를 들어 삼성그룹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홍석현 주미대사의 대화가 녹음된 도청 테이프를 비롯해 이번에 압수된 것의 내용도 모두 공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한변협 하창우 공보이사는 "테이프 등에 담긴 내용을 덮어버릴 경우 국민적 의혹만 커질 수 있다"며 "검찰 수사를 통해 모든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록 도청이라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확보된 범죄 혐의의 증거지만 정상적인 수사를 통하면 별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테이프 등에 담긴 내용은 절대 공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통신비밀보호법(16조)이 불법 도청된 내용을 공개하거나 누설하는 것을 위법한 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 도청한 대화에서 얻은 증거는 대표적인 '독수(毒樹)의 과실'에 해당된다. 법원에서 유죄의 입증 자료로 사용할 수 없다. 독수의 과실이란 독이 든 나무에 열린 열매에도 독이 들었다는 뜻으로 1937년 미 연방대법원이 불법으로 수집된 증거는 유죄의 입증 자료로 인정하지 않아 판례가 됐다. 따라서 법 집행기관인 검찰이 스스로 명백한 실정법 위반 행위를 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이다.

◆ "불법 도청 피해자 명단 공개는 불가피"=검찰은 이날 "테이프 등의 제작 및 보관 경위 등에 대해 철저히 수사해 진상을 명백히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에 따라 공운영씨 등 당시 미림팀의 불법 도청행위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을 상대로 도청이 이뤄진 일시와 방법, 대상 등에 대해 수사를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럴 경우 당시 안기부에 의해 도청당한 피해자들의 명단 등이 불가피하게 드러날 것 같다. 검찰이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공씨 등을 기소하려면 범죄혐의를 특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이 도청 테이프의 내용을 일일이 듣고 분석하는 작업을 벌일 가능성은 커보이지 않는다.

특히 검찰이 테이프 내용을 청취할 경우 "구체적 내용을 공개하라"는 여론의 압박에 시달릴 우려도 있다. 따라서 검찰은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은 듣지 않고 공씨가 도청을 한 인사들의 명단만 어느 정도 밝힐 가능성도 있다. 또 검찰 수사에서 안기부에 의해 도청당한 사실이 드러난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사생활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낼 수 있어 대규모 소송 사태도 배제할 수 없다.

◆ "형평성 논란 불거질 듯"=검찰에 압수된 테이프 등의 내용이 드러날 경우 수많은 피해자가 양산되는 등 사회적으로 감당 못할 파장이 우려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내용이 공개된 피해자와의 형평성 시비도 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삼성을 겨냥해 불법 도청 테이프 공개를 주장해 온 시민단체들이 이번에 압수한 불법 테이프 등의 내용 공개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여기다 MBC가 안기부가 도청한 불법 테이프가 수없이 존재하고 있는 점을 알면서도 유독 특정 테이프 내용만 공개한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종문.하재식 기자 <jmoon@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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