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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관의 명소명인 ⑤ 도담삼봉] 호연지기 키우던 정도전의 모습이 어른어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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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도담삼봉(島潭三奉)은 아름답고 특이한 모양 때문에 단양팔경 중 으뜸으로 꼽힌다.

물안개 위로 떠오르는 도담삼봉의 일출을 보고 있으면 무릉도원에 와 있는 듯하다. 안갯속에서 살포시 모습을 드러내는 나룻배는 현실 세계 주민들을 이상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처럼 느껴진다. 도담삼봉 일대는 일출 향연이 끝나고 나면 마을 주민들과 관광객이 모여드는 일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정도전이 뛰놀며 호연지기를 키웠던 도담삼봉은 아름다운 공간이지만 생활하기에 이상적인 공간은 아니다. 가운데 봉우리의 허리춤에 자리 잡은 수각은 방문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수각에 올라갈 수는 없지만 나룻배를 타고 도담삼봉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기에 위로가 된다.

인근 산자락에는 단양팔경 중 하나인 석문이 자리 잡고 있다. 석문의 네모난 구멍으로 주변 풍경을 바라보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석문 아래의 좌측에는 작은 굴이 있는데 옛날에 하늘에서 물을 길러 내려왔다가 비녀를 잃어버린 마고 할미가 비녀를 찾으려고 흙을 손으로 판 것이 99마지기의 논이 됐고, 주변 경치가 하늘나라보다 아름다워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단양에는 석문 외에도 종지봉이 정도전과 관련이 있다. 정도전의 자(字: 이름 대신 부르던 별칭)가 종지(宗之)인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종지봉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단양 읍내 수변공원 건너편에 있는 봉우리로 인공폭포가 설치돼 있다.

 겨울철에 방문해 보면 인공폭포가 얼어붙어 빙벽을 형성한다. 수변공원에서 종지봉을 바라보면 봉우리의 형상이 음식을 담는 종지를 뒤집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종지봉을 보다 생생하게 체험하려면 고수대교를 건너 우측의 주차장에서 양백산으로 향하는 좁다란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된다. 금정사로 향하는 표지석이 위치한 곳이 종지봉을 바라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인데,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단양 종지봉엔 인공폭포 설치돼

정도전은 신권통치를 구현하고자 했는데, 도담삼봉과 석문을 살펴보면 그가 꿈꾸었던 이상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는 고려 말기인 1342년에 태어나 22세 때 과거시험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국가 재정은 이미 파탄 상태였고 지방의 호족들은 왕권에 도전할 만큼 왕권이 약화돼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신왕조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혼신을 다했지만 공신 세력 간의 권력 다툼과 후계구도를 둘러싼 암투는 끊이지 않았다.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던 정도전은 시문·경국제세·성리학·불교 등 다방면에 걸쳐 능력을 발휘하며 조선왕조의 초석을 다지는 데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한양 천도 후 경복궁과 도성 건립이 완성되고 신왕조의 기틀이 공고해지자 정도전은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사상을 중시했고 무능한 군주는 바꿀 수 있다는 혁명사상을 꿈꾸었으며, 군주는 관념상으로만 절대권을 갖고 재상이 통치의 실권을 가져야 한다는 신권정치를 신봉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라던 신권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정치를 갈망했던 이방원(태종)의 세자 책봉을 막아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와 손을 잡았다.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의 자식들인 방의, 방간, 방원 등과 신덕왕후는 이미 차기 왕위 계승권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핏줄인 의안대군 방석이 정도전의 도움으로 세자에 책봉되자 이방원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왕자의 난 때 최후 맞아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자식들 중 이방원은 자신이 왕이 돼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막강한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언제라도 모반을 도모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이방원의 사병들을 관군에 편입시키려 했지만 왕족 규제는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정도전의 뜻대로 정국이 요동치면 이방원은 힘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방원은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죽여야만 자신이 권좌에 오를 수 있음을 간파했고 주저 없이 칼을 빼들었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자 정도전은 남은 등과 함께 살해됐다. 이방원은 정도전과 함께 세자 방석을 제거함으로써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최고경영자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자문을 구하고 심사숙고해야 하지만,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정확한 타이밍에 실천해야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정도전이 신권정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방원과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했거나 이방원이 권좌에 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전략을 선택했다면, 정도전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높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지만 자신의 본분에서 벗어난 삶을 추구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빠져들기 쉽다. 성공을 꿈꾸는 미래의 영웅들은 정도전의 비극적인 삶을 반면교사로 삼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이영관 교수

1964년 충남 아산 출생. 한양대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기업윤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코넬대 호텔스쿨 교환교수, 국제관광학회장
을 지냈다. 현재 순천향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주요 저서로 『조선의 리더십을 탐하라』『스펙트럼 리더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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