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이래 가장 강력한 권력자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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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11월 5일(현지시간) 발표한 ‘2014년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순위에서 중국의 시진핑(61) 국가주석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그 뒤를 이었다. 시 주석은 지난해에 이어 3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포브스 순위는 변동이 없지만 무게감은 지난해보다 훨씬 있어 보인다. 시 주석은 중국 국가주석(정)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당)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군)을 겸 하는 당·정·군의 명실상부한 최고 지도자다. 개혁을 추진하는 전면개혁 심화영도소조 조장과 안보와 보안, 그리고 안전을 동시에 책임지는 국가안전위원회 위원장, 인터넷의 반정부·반사회 활동을 제어하는 중앙인터넷 안전소조 조장까지 맡아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런 시 주석이 올해 또 다른 ‘직책’을 추가로 맡았다. 포브스는 시 주석에 대한 평가에서 “지난 10월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력을 가진 국가의 수장’이라는 호칭을 추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10월 8일 파이낸션타임스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구매력 평가(PPP) 기준으로 볼 때 17조6000억 달러로 미국의 17조40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고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PPP는 환율과 물가 등을 고려해 실질적인 구매력을 따진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규모 면에서 세계 최대 경제대국으로 평가된 셈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중국의 경제 규모는 1980년만 해도 미국의 10%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 뒤로 연 평균 9.8%의 놀라운 GDP 성장을 거듭하며 같은 기간 2.7%의 성장률을 보인 미국을 마침내 추월했다’고 평가했다. 이 신문은 ‘오는 2020년에는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보다 20% 이상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인들은 환호했고 최고지도자인 시 주석에 대한 지지는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이런 시 주석이 임기 중 언젠가는 포브스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 순위 에서 수위를 차지할 가능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몇 년 안에는 이뤄지겠지만 그게 내년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 주석은 11월 베이징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10~11일)를 주재했다.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및 아세안+3 정상회의(12~13일), 주요 20개국(G20·15~16일) 정상회의 등 다른 다자회의 무대에도 참석한다.

포브스는 시 주석에 대해 “시진핑은 중국 최고지도자가 되는 데 필요한 3개 직책을 한 손에 쥐고 있다”며 “권력의 정상이 오른 뒤 불과 2년 만에 마오쩌둥 이래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됐다”고 평가했다. 시 주석은 2012년 11월부터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전임자인 후진타오로부터 물려받았다. 당시 국가주석직은 당장 물려받지 못하고 2008년 올랐던 국가부주석직만 유지했지만 2013년 3월 임기 10년의 국가주석직에 올라 당·정·군의 3개최고 공식 직책을 겸하게 됐다.

포브스 발표 영향력 있는 인물 3위

최고지도자가 당·정·군의 3개 직책을 겸하는 것은 사실 장쩌민 이래의 전통이다. 하지만 시 주석은 누구보다 이른 시일 안에 이를 모두 장악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도한 덩샤오핑은 1981~89년 중앙군사위 주석직만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 군림했다. 국가주석직은 양상쿤에게, 공산당 총서기직은 자오쯔양에게 각각 나눠 맡겼다. 권력을 당·정·군으로 병립해 자신의 사후 과도한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자오쯔양을 경질하고 장쩌민에게 총서기와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한꺼번에 맡겼다. 장쩌민은 1993년이 돼서야 양상쿤이 맡고 있던 국가주석직까지 차지해당·정·군의 최고위직을 모두 맡을 수 있었다. 3개직 장악에 4년이 걸린 셈이다.

그의 후계자인 후진타오는 전임자인 장쩌민으로부터 이 세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한꺼번에 받지 못하고 당·군·정의 순서로 차례차례 받았다. 1998년 3월 국가부주석을 맡아 후계자로 인정되던 그는 2002년 11월 공산당 중앙위 총서기를 물려받아 당의 최고 책임자가 됐으며 2003년 3월 국가주석 자리도 맡았다. 하지만 군사위 주석은 2004년 9월에야 맡을 수 있었다. 권력 이양에 2년이 걸린 것이다. 하지만 시 주석은 이 3개 직책을 장악하는 데 4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포브스가 ‘마오쩌둥 이래 가장 강력한 권력자’라는 평가를 받는 배경이다.

시 주석은 올해 중국에선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반부패캠페인을 통해서다. 시 주석의 위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지난 4월 2일 벌어졌다. 이날 중국 인민해방군의 최고 간부 18명이 시진핑 주석에 대한 ‘충성 맹세문’을 동시에 발표한 것이다. 중앙군사위원회 기관지인 해방군보는 이날 2개면에 걸쳐 18명 개개인의 맹세문을 실었다. 해방군 최고 지도부는 시 주석이 주창하는 ‘중국의 꿈’과 ‘강군의 꿈’에 대한 지지와 옹호를 맹세했다. 맹세문 위에는 ‘시 주석의 국방과 군대 건설에 대한 중요한 말씀을 깊이 배우고 관철한다. 새로운 시점에서 위대한 강군(强軍)·흥군(興軍)의 실천을 추진한다’라는 제목이 커다랗게 달렸다.

시 주석은 군의 최고책임자인 중앙군사위 주석도 겸하고 있고 공산국가인 중국에서 충성 맹세는 드문 일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군 최고지도부가 이렇게 집단적·공개적으로 충성 맹세를 한 것은 이례적이다. 개혁·개방이 실시된 1970년대 후반 이후 35년 만에 처음이다. 시 주석의 군부 장악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잘 보여준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고, 군부로 옮아가고 있는 시 주석의 반부패캠페인이 영향을 미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맹세문 발표는 해방군에서 군수 분야를 책임지는 총후근부의 부부장이던 구쥔산이 거액의 뇌물 수수로 기소된 지 이틀 만에 나왔다. 시 주석의 반부패캠페인이 중국에서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집단지도체제도 사실상 유명무실

반부패캠페인은 시 주석과 동의어로 통한다. 시 주석은 집권하자마자 공산당 쇄신을 위한 정풍운동에 들어갔다. 당 총서기가 된 지 한 달도 안 된 2012년 12월 초 고위 공산당원의 업무태도 개선을 위한 8항 규정, 즉 ‘당8조’를 제정해 회의 간소화, 근검절약 등을 강조했다. 고위층을 상대로 형식주의와 관료주의, 군대 부패를 일소하라는 ‘군10조’도 하달했다. 금주령까지 내렸다. 시 주석은 정풍운동을 고위층부터 시작하도록 해 솔선수범을 강조했다.

시진핑은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7인 상무위원 공동으로 6일 간 공개 자아비판을 했다. 석 달 뒤에는 지방으로 직접 내려가 공산당 간부들의 자아비판을 독려했다. 최고위층이 자아비판을 하는데 아래에서 안 하고 배길 수가 없었다. 중앙기율위에서 208개팀의 순시조(감사팀)를 전국에 파견했다. 7만4000명의 공직자가 부패 혐의 적발로 자리를 잃었다. 근무도 하지 않고 국가가 지급하는 급료와 수당을 챙기던 관료 16만2629명을 적발해 공직에서 추방했다. 훙바오(뇌물)를 받았다고 자진 신고한 공직자만 10만여 명에 이른다.

공직자가 샥스핀 먹는 것을 금지하면서 베이징의 고급 식당가가 썰렁해졌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시 주석의 반부패 드라이브는 힘을 얻고 있다. 실제로 샥스핀이 나오는 식사 자리가 낀 민간 주최의 세미나·심포지엄 등에서 공직자들이 발표가 끝난 뒤 차만 마시고 자리를 뜨는 모습이 흔해지고 있다. 관료들의 접대비, 관용차 운영비, 출장비 등에서 530억2000만 위안(약 9조2336억 원)의 비용을 절감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시진핑 주석과 그의 아내 펑리위안 (사진= 중앙포토)

이런 과정에서 시 주석의 정치적인 위상는 더욱 확고해졌다. 중국은 덩사오핑 이후 9인 당 중앙위의 7인 상무위원회가 지배하는 집단지도체제였다. 집단지도 체제는 마오쩌둥 1인 통치의 폐해를 경험한 덩샤오핑이 이를 막기 위해 고안한 중국 공산당의 통치 시스템이다.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체제는 시 주석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7인 체제로 줄었다. 이제는 시 주석의 1인 체제가 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명분도 분명하다. 부정부패를 추방하고 개혁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력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명분의 개혁 드라이브 속에서 시 주석의 제안에 토를 다는 상무위원은 없다. 상무위원 중에도 몇 명이 이 드라이브에 걸려 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 대상은 보안 분야를 맡은 정법위원회 서기 출신의 저우 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그의 측근에 대한 부패 조사가 진행 중인데 저우융캉 본인도 부패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럴 경우 상무위원 중 처벌을 받는 첫 사례가 된다. 저우융캉이 보여준 집단지도체제의 폐해도 개혁과 권력 집중의 중요한 명분이 되고 있다. 이처럼 집단지도체제의 구성원인 상무위원도 처벌할 수 있는 시 주석의 권력에 대항할 사람은 지금 중국에는 없다.

개혁은 중국의 비즈니스 환경을 바꿔 중국 경제의 수준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 공권력은 특권과 독점권으로 외국 기업인들에게 악명이 높다. 접대와 선물이 만연하고, ‘꽌시(關係)’ 등 인맥이 아직도 기업의 생존을 좌우한다. 뇌물 같은 검은 거래가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이 정공법으로 비즈니스를 하기가 어려운 나라로 꼽히는 이유다. 이래서야 더 이상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시 주석의 경고는 중국 사회 곳곳을 조용히 바꾸고 있다.

‘마오덩시(毛鄧習)’라는 유행어도 나와

중국에서 시 주석은 이미 시진핑은 이미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마오덩시(毛鄧習)’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다. 당정군의 최고 직책을 겸한 최고지도자에서 최고의 권력을 독점하는 실질적인 1인자가 된 것이다. 그는 ‘중국의 꿈’이라는 미래 지도 이념도 제시했다. 당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에 오르면서 했던 연설에선 ‘중화민족의 부흥’을 역설했다. 권력·실천·이론을 겸비한 지도자로 우뚝 선 셈이다. 이제 시 주석은 그런 권력과 중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세계적인 국가로 만드는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시 주석의 삶은 파란만장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중국 8대 원로의 한 명으로 불리는 시중쉰 전 부총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친이 문화혁명기에 고초를 겪는 바람에 지방 농촌을 따라다니며 성장했다. 고위직 부모를 둔 2세를 지칭하는 태자당 계열로 분류되지만 젊어서 공산당 입당이 10번 거절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그의 부친은 덩사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기 시작한 1978년 복권돼 광둥성 당서기를 지내면서 ‘경제특구’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경제특구는 중국 경제성장을 이끄는 견인차가 됐다. 개혁·개방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79년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부총리 비서로 공직에 입문했다. 칭화대에서 ‘중국 농촌시장의 시장화 연구’라는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지방의 현·시·성의 당서기를 맡으며 차근차근 권력의 사다리를 올라갔다. 부친이 당의 8대 원로로서 보수파의 지지를, 개혁·개방의 설계자로서 진보파의 지지를 모두 받았다는 점이 큰 힘이 됐다. 중국의 국민가수로 통하는 펑리위안도 힘이 됐다. 문예대 소속의 해방군 장성으로서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시 주석의 지금 자리로 올려놓은 것은 겸손하고 치밀하면서도 강한 추진력을 보여준 시 주석 자신의 품성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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