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투자 기피 증후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선선히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지경을 두고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고 한다. 요즘 우리 경제가 처한 모습이 꼭 그렇다. 기업들은 걸리는 게 너무 많아 투자할 엄두가 안 나고, 버티자니 자꾸 경쟁에 처질 것만 같아 불안하다. 현상 유지의 안전한 길을 택한다. 그래서 투자가 지지부진하다. 여름 바캉스 시즌을 맞아 지갑을 확 열고도 싶지만 도무지 뒷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소비가 엉거주춤이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벌써 2년을 넘었다.

정부도 이제는 뾰족한 대책이 없는지 속만 끓이는 눈치다. 재정도 퍼부을 만큼 퍼부었고, 금리도 낮출 만큼 낮췄다. 그래도 경기는 꿈쩍도 않는다. 이도저도 도무지 약발이 안 듣는다고 생각했는지 본업은 제쳐 두고 온통 부동산 대책에 빈 삽질만 해댄다.

경기침체가 오래 끌면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무감각증과 무기력증이다. 상반기 성장률이 3%에 불과하다는 한국은행의 우울한 발표에도 그저 시큰둥할 뿐이다. 도무지 반응이 없다. "어이쿠,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나겠구나"하는 경각심도 없고,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해 보겠다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삼복더위에 후줄근하게 늘어진 무명 바짓가랑이처럼 무기력하다. 무더위보다 더 답답하고 짜증나는 모습이다.

언젠가는 경기가 살아나지 않겠느냐는 정부의 희망 섞인 다짐은 고장 난 축음기에서 나오는 애절한 소야곡처럼 들린다. 이제는 그 소리마저 가물가물하다. 대통령은 연초에 즐겨 듣던 '경제 살리기 행진곡'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불협화음 가득한 '연정(聯政) 변주곡'을 확성기에 걸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불법 도청 테이프 파문은 단연 장안의 인기프로로 자리 잡았다. 거덜나는 살림살이에는 아랑곳없이 음험한 '관음증(觀淫症)'과 '저주의 굿판'에 온통 정신이 팔렸다.

그래도 다시 한번 따져 보자.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고, 어디가 꼬였기에 경제가 이 모양인가. 투자와 소비가 부진하고, 수출마저 시들해지고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병세다. 소비 부진은 가계가 아직 카드빚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한 탓이라니 그렇다 치자. 수출 둔화는 원화 강세에다 고유가가 겹쳐 어쩔 수 없다니 그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투자뿐이다. 그런데 투자만 살아나면 만병이 다 낫겠는데 투자 부진의 병인(病因)이 확실치 않은 게 문제다. 그동안 국내 기업들의 실적이나 수출 호황을 보면 당연히 설비투자를 늘렸어야 마땅하다. 은행들이 서로 돈을 꿔주지 못해 안달이고, 금리가 사상 최저수준인 걸 감안하면 돈이 없거나 금리가 높아 투자를 못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혹자는 투자 부진을 두고 팽배한 반기업 정서와 빗나간 분배중심 정책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불안감 때문이라고 하고, 혹자는 정부의 지나친 규제가 이런 증세를 키웠다고 진단한다. 노사분규와 북핵 문제가 합병증을 불렀다는 분석도 있다. 공인받지는 못했지만 '자본 파업'이라는 신종 질병에 대한 임상보고도 있었다.

투자 부진은 한국 경제를 만성적인 저성장병으로 몰고갈지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곳곳에 부작용을 낳고 있다. 기업들의 외면으로 돈을 굴릴 데가 없어진 금융회사들이 앞다퉈 주택담보대출에 나서면서 막대한 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돈이 저금리로 갈 곳을 잃은 400여조원의 부동자금과 만나 부동산값에 상승압력을 높였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을 짓누르자 이번에는 뭉칫돈들이 주식시장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실질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은 주가는 허망하기가 부동산 거품 못지않다. 저금리의 폐해가 불 보듯 뻔한데도 정부는 금리를 올리지 못한다. 투자 촉진이란 명분에 발목이 잡혀서다. 규제를 풀어 기업의 투자를 부추기려 하지만 이번에는 지역균형발전 논리가 떡하니 가로막는다. 기업이 투자하겠다는 곳은 절대 안되고, 안 가겠다는 곳만 된다니 투자 기피증이 다시 도진다. 기업규제-투자부진-저금리 고수-부동산.주식 거품이 맞물려 돌아가는 형국이다. 정답을 애써 피해 가거나 외면하지 않는다면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서 끊어야 할지는 분명하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