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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를 맡고 있지만 단순한 출납인"|중년주부의 돈 관리…그룹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월급을 봉투 째 가져온다. 그러나 아파트관리비, 식비 등 매달의 고정지출을 하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으니까 이렇다하게 경제권을 쥐었다고도 할 수 없다.』 『남편은 월급 봉투를 건네주었다는 것만으로 모든 골치 아픈 집안 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지출은 내가 맡지만 중요한 것은 남편의 동의 아래서니까 이를테면 하수인인 셈이다.』 그룹 인터뷰에 응한 12명의 중년여성 중 9명이 월급장이의 아내. 9명중 8명의 남편이 월급을 봉투 째 아내에게 말기고 용돈을 타가거나 용돈을 뺀 나머지를 아내에게 맡겨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도록 한다고 대답했다.
월급을 봉투 째 건네는 것은 아내로 하여금 『완전히 나를 믿고 있구나』하는 만족감을 주지만 동시에 남편의 수입을 올바르게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 주부 최규완씨의 말이다.
특히 연령층으로 중년기에 접어든 여성들은 막대한 자녀교육비, 나날이 늘어가는 식비, 사회와 친척사이에서의 커지는 비중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하는 경조비 등에 자칫 짓눌리기 십상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필연적인 현상의 하나이지만, 끊임없이 개발되어 시장에 나오는 새롭고 편리한 생활용품 등 소비재에의 욕구 또한 이웃과 나를 비교할 때 생기는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이들 중년의 주부들은 새삼 돈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돈만 있으면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말이 새롭게 가슴에 와 닿는다. 그 위에 『누구의 부인은 집을 지어 팔아 큰 돈을 벌었다, 아무게 부인은 주를 사서 한 재산을 모았다』는 등의 풍문은 자신만이 못났고 뭔가 손해보며 살고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같은 월급장이이면서도 월등히 우리보다 낫게 사는 집 얘기를 하면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처가가 부자인가 보지, 마누라가 유능하니까…식으로 받아요. 그때마마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혼생활 13년째라는 40대 초의 한 주부의 얘기다.
인터뷰에 답한 대부분의 주부들이 집안의 경제권을 쥐고 있다지만, 자신은 소비생활의 주체일 뿐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쓰이는 것 같았다. 여자의 손으로 몇백억씩을 주물렀다는 장여인 사건이 아니라도 부동산 투기, 증권투자 등으로 돈을 벌었다는 잘난(?) 여자들의 풍문은 그들을 기죽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세대만 해도 내 아내, 내 자식은 내 손으로 벌어 먹여야 한다는 투철한 책임의식을 절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남편 세대는 말은 않지만 은근히 짐을 나누어 졌으면 하는 기색이 역력해요. 그만큼 약해진 것 같아요.』
가족 모두가 자신의 봉급에만 매달려 사는 것이 때로는 짜증나는 듯한 기색, 처가 덕을 보는 것을, 마누라가 돈을 버는 것을 농반진반으로 은근히 부러워하는 듯한 남편의 태도가 아내들을 외롭고 섭섭하게 하는 것 같았다. 남편을 돕는다고 계를 하다 계가 깨져 가정 파탄이 일어나는 것도 이런 남편의 태도와 무관하지 앓다.
『이제는 알뜰히 살림살이를 하고 가족을 돌보는 주부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될 것 같습니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부업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지만 선뜻 나설 만큼 확신이 생기는 것이 없어요. 적은 월급을 쪼개 알뜰히 살며 은행적금이나 곗돈을 부어 적으나마 목돈을 만드는 고지식한 사람은 무시되는 풍토인 것 같아요.』
실제로 투기로 재산을 모은 아내를 가진 남자나, 사위의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부를 가진 처가를 둔 남자의 숫자는 극소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실제보다 훨씬 크게 부풀려져 알려지고, 또 그것이 한국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력을 상당히 미쳤던 것 또한 사실이라고 작가 윤남경씨는 말한다.
사회분위기 뿐 아니라 사회보장은 안되어 있는 채 이제는 자신의 노후를 자녀들에게 기댈 수 없다는 깨달음, 실제의 정년은 오히려 빨라지는데 자녀의 독립 시기는 늦어지는 사회현상 등이 여성들로 하여금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한다고 김희 교수(국민대·의상학)는 말한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금리아래서 어떻게 푼돈을 모아 재산을 만들고, 화폐가치를 유지해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등장한다. 사회에서 지탄받는 일련의 환물투기, 부동산투기 등도 사실상 우리가 살아온 70년대의 극심한 인플레를 이겨나가기 위한 자위수단이었다는 것이 박혜경 교수(숙명여대·가정경제)의 얘기다.
『사회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를 지켜 나갈 수 있는 자아확립, 그리고 나하나 쯤이야 괜찮겠지 하는 몰도덕에서 여성들이 벗어나야 합니다. 부업을 갖고 재산을 모으는 것은 현대를 사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능력이지만, 지나친 허욕은 새로운 문제의 소지가 되므로 적극 피해야할 것』이라고 이요식씨(존타클럽 총무)는 얘기한다. <박금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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