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59. 고마운 아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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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신혼 시절의 필자 부부.

귀국하자마자 방송 출연 규제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러나 불러주는 방송사가 없었다. 내게는 'TV 코미디 분야를 개척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아주겠지 하는 것은 결국 내 욕심에 불과했다. 이젠 코미디언도 오로지 상품 가치가 얼마나 되느냐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두 달 뒤 아내가 돌아올 때 번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밤무대를 뛰었다. '왕년의 스타'가 아니라 신인 코미디언이란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마침내 전세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하고, 중고지만 승용차도 한 대 샀다.

당시 나에게 큰 숙제가 하나 있었다. 삼룡사와 부도로 생긴 빚을 갚는 일이었다. 묵은 빚을 갚기 위해 더 많은 밤업소를 뛰어다녔다. 밤무대에 얼굴을 내밀며 활동을 재개하자 방송사에서도 출연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주역 코미디언이 아니었다. 그저 주는대로 배역을 성실히 소화해야 했다. 코미디의 스타일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우리 세대의 코미디언들은 갈수록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방송사 녹화장에서 간혹 옛 동료를 만나 얘기하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귀국한 지 1년반이 지나자 빚을 다 갚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MBC의 '웃으면 복이와요'에도 다시 출연했다. 정말 고향으로 돌아온 심정이었다. '배삼룡의 그 시절 그 노래'란 두 시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도 진행하게 됐다. KBS의 '내 마음 별과 같이'라는 드라마에서 정식으로 TV극 연기에도 도전해 봤다. 유랑극단을 동경하는 여관집 아들 역이었다. 내가 유랑극단을 쫓아 배우의 길로 들어설 때와 여러 가지 상황이 비슷했다.

오랫동안 나는 전원생활을 꿈꾸어 왔다. 귀국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우리 부부가 지낼 수 있는 한적한 집을 마련했다. 마음의 여유를 다시 찾게 됐다.

그러다 여유도 잠시, 1996년에 다시 위기를 맞았다.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부산에 출장갔다 돌아온 날 쓰러졌다. 팔 다리가 마비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꼬박 1년을 병석에 있어야 했다.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며 정밀 검사를 받았지만 병명을 알 수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갔다. 그는 "수십년간 몸 속에 피로가 누적됐다"고 말했다. 그에게 6개월간 치료를 받고서야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병석에 있는 동안 아내는 정성껏 나를 돌보았다. 아내는 강했고, 간호는 극진했다. 귀국 후 빚쟁이들이 몰려들 때도 그는 힘든 상황을 헤쳐나갔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모든 게 보장됐지만 끝까지 내 곁을 지켜주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감사한 것은 돈 관리였다. 아내는 사업가 출신답게 아주 철저하고도 야무지게 돈을 관리했다. '수입이 많던 전성기 때 아내를 만났더라면…'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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