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우리 교포에 첫 왕복여행 허가|만주사는 안부룡씨 부부 중공여권으로 고향 나들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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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꿈속같이 두달을 지냈습니다. 어느틈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달라졌는지 지금도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아요』
일제의 압정을 피해 만주로 건너간지 37년만에 중공여권을 갖고 일시귀국한 재만교포가 있다. 안부룡(61)·이옥림(49)씨부부.
이들부부는 20여일후에는 다시 홍콩을 거처 만주로 갈 예정이다.
안씨부부가 귀국한것은 지난 5윌22일. 전북순창에 사는 안씨의 형 수장씨(65) 의 초청으로 중공흑룡강생공안청에서 발행한「호조」(여권)을 갖고 홍콩올 거쳐 입국, 감격의「고향나들이」를 즐기고있다.
안씨가 사는 곳은 만주흑룡강생오상현의 소산자인민공사.오상현일대는 2백만명의 한국인이 사는 만주에서도 문도와 함께 한국인 밀집지역으로 대부분 주민이 한국인들.
안씨는 고향인 전북순창에서 45년 만주로 건너가 농사를 짓다 해방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눌러앉아 살고있다.
51년 충북옥천출신인 부인이씨와 중매로 결혼, 아들4형제와 손자가 3명.
안씨부부는 해방후 끊긴 고향소식을 애타게 그려오다 74년 안씨가 고향의 형에게 보낸 편지를 형이 받고 답신올 보내면서 연락이 되어 여러차례 편지왕래끝에 대한적십자사의 주선으로 이번에 초청방문이 이루어진것.
안씨는 지난4월13일 여권을 받아 5월13일 하르빈에서 비행기로 광주로 가서 홍콩에 머물다 25일 KAL기편으로 김포에 도착했었다.
『등소간등장 후 중공에는 큰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실옹주의 노선에 따라 과거 모택간시대에는 생각도 못했던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요. 생활도 다소 나아졌구요』
안씨는 등소평이후 가축과 일정규모이하 농지등 일부 사유재산제도가 인정되면서 농업생산이 크게 늘고있다고 햇다.
특히 한국인둘은 중국인들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고 알뜰한데다 중공당국의 소수민족보존정책에 따른 지원도 있어 전체적으로 중국인들보다 잘산다고 말했다. 안씨는 지난해 혼자 논8마지기를 개답, 벼 3천5백근을 수확해 1천원 (l원은 한화 5백원)의 수익을 올렸다고 했다. 그곳 물가는 쌀한가마 85원, 구두 한켤레에 23원정도, TV는 5백50원쯤 돼 일반가정에서는 사기 힘들다.
중공당국의 소수민족보호점책에 따라 한국어로 교육하는 한국인만을 위한 소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가있으며 선생님도 대부분 한국인이라고 한다.
어디가나 한국인들은 교육열이 높아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때도 멀리 북경·상해로 유학시키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했다.
또 결혼은 한국인끼리만 하는데 특히 남자둘은 중국여자와의 길혼은 금기처럼 되어있율 정도라는것.
한국인끼리 결혼하기 때문에 결흔퐁속도는 크게 변하지 않고 「여관잔치」로 부르는 신흔여행은 돈만 있으면 떠날수 있다고 한다.
안씨는 만주교포들은 저녁에 KBS사회교욱방송과 제1방송을 듣는것이 가강 큰 츨거움이라고했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노래와 연속극은 젊은이듈에게 큰반응믈 일으키며 젊은이들은 한국의 유행곡을 카세트에 복사, 서로 돌려가며 듣고 즐긴다는것.
안씨는 방송을 통해 교포들이 「88서울올림픽」소식올 다들 알고 있다면서『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고국에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있다』 고 소식올 전했다.
안씨는 『북한출신주민들은 북한친척과의 편지왕래조차 최근 꺼린다』 면서 오히려 북한주민들이 북한을탈출, 오상현지역으로 가끔 들어온다고 했다.
서울종로6가72의7 조카딸 최순덕씨 (45) 집에 묵으며 서울구경을 하고 있는 안씨부부는『중공에있는 자식들을 불러다 함께 고국에서 살고싶지만 당분간은 자식둘을 불러올 길이 없어 20여일후엔 다시 중공으로 돌아가야 될 것같다』면서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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