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티에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은행 예금을 3년만 묻어두면 2배가되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물론 인플레의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긴 했지만.
이번 6·28 경제조치는 우선 금리생활자들의 달콤한 꿈을 깨어놓았다. 우리 나라 사채시장 규모는 통칭 1조원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 예산의 1할도 넘는 돈이다 .이 억수 같은 돈이 장차 어디로 밀려갈지 궁금하다.
금리생활자는 이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하나다. 고대로부터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악명이 높기로는 「샤일록」을 빼놓을 수 없다.「셰익스피어」는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도 그의 소설『죄 와 벌』에서 고리대금 노파를 『이 (?)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유한계급이나「프티 부르좌」라는 말도 모두 이런 사람들을 빗대놓고 하는 말이다. 이른바 「랑티에르」(rentier=금리생활자)의 인상이 짐작된다.
재산은 갖고 있지만 경영이나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 특히 봉건시대의 기성 지주가 그런 인상의 대표적인 예다. 일제시대 소작인을 부리던 지주도 마찬가지. 사회의 눈이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달은 금리생활자를 보는 눈을 바꾸어 놓았다. 자본 소유자와 경영담당자가 반드시 일치해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것은 기업의 증권 화 현장에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자본가도, 영세민도 아닌 중간층의 경우다. 가령 퇴직금 2, 3천 만원으로 노후의 생활을 꾸려가던 「마지널 피플」(한계 생활인)들은 저금리 사회에선 곤란하다. 당장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되었다.
이제까지 3천 만원을 은행에 맡겨 놓고 살던 퇴직자들은 연4백 만원 가까운 돈을 받을 수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그 액수는 5백 만원이 넘었다. 노부부의 생활비는 된다.
그러나 지금은 수입이 당장 3분의 2로 줄어들었다. 3천 만원 정기예금자가 받을 수 있는 금리는 월20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생활이 문제다.
한마디로 이젠 모든 사람들이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활동력이나 능력이 없는 사회금리생활자들에겐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생각 같아선 구멍가게라도 열었으면 좋은데 그것도 쉬운 노릇은 아니다.
흔히 외국의 저금리 사회에선 보험 같은 제도에 의지할 수 있다. 물론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는 사회는 별 문제지만. 가까운 일본만 해도 보험이 발달한 이유가 그런데 있다. 일본의 금리는 6%선이다. 이런 사회에서 2, 3천만 엔의 목돈을 은행에 맡겨놓고는 생활할 수가 없다.
그러나 보험마저도 인플레가 성행하면 무위에 그치게 된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이번 경제활성화조치도 인플레 억제가 최대의 과제다. 은행의 실질금리가 보장되지 앉으면 모든 화폐질서가 무너지고 만다. 그보다도 국민의 심리적인 좌절감은 어떻게 보상받을 길이 없다. 정부나 기업이나 국민이 끝내 해야할 것은 바로 물가안정을 지키는 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