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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반도체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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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나라 반도체 시장구조는 좀 독특하다. 우리가 생산한 반도체 중 90% 이상은 외국으로 수출하고, 거꾸로 국내 수요 중 90% 이상은 외국산으로 채운다. 명색이 '반도체 강국'인데, 자급자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고민의 일단이 있겠으나, 우리의 반도체 대부분이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비난의 여지가 있을 리 없다.

총수출액 중 반도체 비중이 이미 10%를 훌쩍 넘어선 마당에 우리는 좋건 싫건 전 세계를 상대한다. 그것도 내로라하는 세계 굴지의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과 호시탐탐 우리를 정조준하고 있는 강력한 경쟁사들 말이다.

매일매일이 치열한 전쟁터인 세계 반도체 시장은 국운을 건 외교전과 다를 게 없다. 주변국들의 복잡한 역학구도를 면밀히 읽어 '실리'를 챙겨야 하는 '고도의 전략적 외교'는 고차방정식의 해법 찾기보다 더욱 어려울 터다. '모 아니면 도' 식의 미숙한 이분법적 발상의 초보 외교로는 어림도 없다.

반도체로 외교를 한다? 반도체를 아직 기계의 부품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까짓 부속품 팔아 얼마나 남는다고 무슨 그리 호들갑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전자업체로는 세계 최초로 '100억 달러 순이익클럽'에 가입한 삼성전자의 여러 사업 중 반도체가 가장 크게 기여했다면, 반도체에 대해 아직도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이 될까?

미국 최고 무역기구인 EIA(Electronics Industries Alliance)는 매년 미국 IT 업계에 가장 크게 기여한 개인 1명을 선정해 상을 준다. '미국 IT 업계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리는 이 상의 올해 수상자로 애초에는 빌 게이츠 등이 거론되었으나, 결국 비미국인으로는 최초로 필자가 이 상을 받게 되었다. 비록 시상 규정의 요식에 따라 필자가 개인 자격으로 받기는 했지만, 이 상은 전 세계에 있는 우리나라 국적의 모든 반도체 종사자가 공동수상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작은 성과지만, 우리의 '반도체 외교 역량'이 한 단계 더 성숙, 이제는 적어도 반도체 분야에서만큼은 미국이 우리를 인정한 것이다.

1년 중 필자가 해외출장에 할애하는 150여 일 동안에는 정신적.육체적 에너지가 국내에서보다 곱절은 필요하다. 한두 개의 목적만을 가지고 가는 느긋한 출장은 애당초 꿈도 꿀 수 없다.

대형 거래처 방문, 세계 IT 리더들과의 만남, 해외 유수 학회 및 대학에서의 특강, 핵심인력 채용 인터뷰, 삼성전자 IR 등등을 단 한 번의 짧은 출장에서 소화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몸은 고달프지만, 그래도 마음은 즐겁다. 우리 반도체의 위상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IT 업체들이 이제는 우리를 단순한 공급자로서가 아니라 우리와 끈끈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원하는 상황에까지 와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의 변화지만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필자의 회사는 반도체 전체로는 아직 2위다.

필자의 꿈은 물론 세계 정상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과학에 국경은 없으나 과학자에게 조국은 있다"는 말이 있듯, 기업에도 국경은 없으나 국적은 있어야 한다. 만드는 것의 90% 이상을 수출하는 우리의 반도체 산업 특성상 해외시장에 쏟아야 하는 정성은 그저 보통의 일상적인 노력으로는 안 된다.

해외에서 직접 발로 뛰는 주재원들은 물론 시차가 뒤바뀐 국내에서 이들을 밤낮없이 지원하는 우리의 모든 반도체 종사자들은 전 세계를 상대로 하되,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해 뛴다는 점에서 모두 다 손색없는 '직업 외교관'이다. 활동은 밖에서 하더라도 이를 통해 얻는 부가가치는 모두 국내에 남기는 이른바 '줏대 있는 기업'의 존재야말로 또 다른 형태의 '외교적 승리'에 다름 아닐 터다.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

◆약력=서울대 전기공학과 졸업, 매사추세츠주립대 공학박사, 스탠퍼드대 책임연구원, IEEE 펠로, 비즈니스위크 선정 아시아스타 25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