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미술선생님…나의 유학 적극 옹호, 일인선생들 반대 물리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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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전남여고보에 입학해서 욱고녀를 졸업했다. 해방후엔 전남여고로 이름이 세번씩이나 바뀐 나의 모교.
내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국민학교 시절, 미술의 고된 길에 회의와 좌절을 반추하던 대학시절, 내가 몸담았던 모든 학교와 나를 깨우쳐준 모든 스승들이 기억속에 생생하지만 그중에도 여고시절의 그 처녀선생님을 잊지 못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큰 고비인 사춘기라는 계절의 탓인 듯도 싶다.
학교이름이 욱고녀로 바뀐 여고2학년 때 새로 미술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김임년 선생님. 미인은 아니었으나 수수한 용모에 안경을 끼신 모습이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처녀여교사로 학교기숙사에서 한방을 쓰며 사감일까지 맡아보셨다.
평소 말씀이 없으셨고 안존한 몸가짐이 우리네 전통적 현모양처의 전형. 그러나 내가 특히 김 선생님에게 끌렸던 것은 어쩐지 그 외롭고 쓸쓸해 뵈는 인상 때문이었다. 나도 그 무렵 그렇게 외로왔었다. 방과후면 선생님 방에 놀러가기도 했고 그때로선 귀하던 파인애플을 사다 선생님 드시도록 몰래 넣어두기도 했다.
그림에 취미를 갖고 막연히 그림을 전공해보겠다는 생각만 가졌던 내가 정작 결심을 굳힌 데는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4학년졸업을 앞두고 내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진학을 희망하자 일본인 담임선생님은 극력 반대했다.
직원회의에서까지 격론이 벌어졌다. 전시 어려운 시국에 식민지여학생이 미술을 전공한다는 것은 일인교사의 의견처럼 『턱도 없는 짓』이었다.
그때 평소 그렇게 얌전하기만 하던 김 선생님이 뜻밖에도 정면으로 나서 편견을 공박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내 원서를 써주기로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지금 경남 어느 조용한 소읍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있다는 김 선생님. 동경유학 후 두어차례 선생님의 관심에 소홀했던 자책감 때문에도 더욱 잊지 못하고 오늘까지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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