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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3)<제77화>사의 혈투 60년(61)사전오기|김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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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WBA밴텀급 챔피언이 된 홍수환은 5개월 후인 74년l2월28일 필리핀의 「폐르디난도·카바넬라」를 장충체육관으로 불러들여 판정승으로 1차 방어에 성공했다. 이 대전은 67년10월 챔피언 김기수가 「프레디·리틀」과 2차 방어전을 벌인 뒤 꼭 7년만에 서울에서 거행된 세계타이틀 매치였다. 그러나 이 타이틀 매치는 당시로는 엄청난 대전으로 후유증을 남겼다.
대전료로 홍은 2천만 원, 「카바넬라」는 7천 달러(당시환율로 3백50만원)를 각각 받았는데 김주직 프러모터는 6백만 원의 결손을 보고 말았다. 이 같이 국내 여건이 어려워 홍수환은 결국 2차 방어전을 적지에서 벌여 타이틀을 잃고 만다.
그는 이듬해인 75년3월15일 20전20KO승의 멕시코 KO왕인「알폰소, 자모라」와 로스앤젤레스에서 2차 방어전을 벌였다. 그는 대전료로 1차 때보다 1만 달러가 많은 5만 달러를 받았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는 체중조절의 실패로 이미 시합 전에 패하고 있었다. 3차계체량에서 어렵게 통과했다. 이는 훈련부족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는 챔피언이 된 뒤 스승인 김전호 트레이너와 헤어지는 등 잡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당시 프로복싱에 매료되어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걱정이 된 나머지 김준호 트레이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홍수환의 2차 방어전에 동행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그가 체중조절에 실패한 것은 연습부족 외에도 로열젤리의 지나친 복용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는 시합을 며칠 앞두고 체중조절로 식사를 못하자 체력을 위해 로열젤리를 많이 복용한 것이 탈을 일으켰다. 로열젤리가 체내에서 상승작용을 일으켜 체중조절에 더욱 애를 먹게 한 것이다.
홍수환은「자모라」에게 펀치 한번 날려보지 못하고 4회2분37초만에 연타를 맞고 KO당했다. 허무한 타이틀 상실이었다. 하루전날인 14일에는 김현치가 마닐라에서 WBA주어라이트급 챔피언 「벤·빌라 플로트」에게 도전, 판정패한 뒤여서 한국프로복싱은 하루만에 동서에서 묵사발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홍수환은 좌절하지 않고 2개월 후인 7월 부산에서 태국의 「보코솔」과 동양밴텀급 타이틀전을 가져 판정승으로 다시 챔피언이 됐다. 76년10월에는 WBA밴텀급 챔피언인「자모라」를 인천으로 불러들여 다이 틀 탈환을 노렸으나 12회2분52초만에 TKO패했다.
홍축은 멕시코주심의 TKO선언이 너무 빠르다고 링 위로 뛰어오르는 등 큰 소동을 빚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WBA는 한해 한국을 기피지역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홍수환은 이후 체중의 부담을 느껴 체급을 올렸다. 때마침 WBA는 주니어 페더급을 신설, 4강 전을 벌여 챔피언결정전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국내대표를 뽑기 위해 홍수환과 염동균을 대결시킨 결과 홍이 판정승했다.
홍수환은 일본의「다나까」와의 4강 전에서도 역시 판정승을 거두어 마침내 파나마의「엑토르·카라스키야」와 최종결정전을 벌이게됐다.
두 복서는 대전료로 똑같이 5천 달러씩으로 규정되었다. 77년11월27일 홍수환은 1만6천 여명의 관중이 꽉 들어찬 뉴파나마 체육관 링 위에 올랐다.
상대방 「카라스키야」는 17세로 어리긴 하나 11전11 KO승의 전승을 마크,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닉네임을 갖고있는 하드펀치였다. 홍은 1회부터 적극 공세를 펼쳐 유리하게 이끌었는데 2회 들어 파란만장의 드라머는 시작됐다.
1분10초께 「카라스키야」의 연타를 안면에 맞은 그는 벌렁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뜻밖에 다운을 당한 그는 다시 일어났으나 미친 듯한「카라스키야」의 공세에 말려 모두4차례 다운을 당하며 공이 울려 겨우 회생됐다. 규칙회의에서 3번 이상 다운되어도 자동KO로 인정 안 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KO패는 면했다.
그러나 3회 들어 불사조 홍수환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그는 3회에 들어서자 링 가운데로 뛰어나가 승리 장으로 방심한 「카라스키야」를 맹공, 로프로 밀어붙였다.
기회를 잡은 그는 레프트 결정타를 옆구리와 안면에 명중시키자「카라스키야」는 끝내 침몰하고 말았다. 이 때가 39초 때이며 49초에 카운트아웃, 홍수환의 기적 같은 역전K0승의 드러머가 탄생한 것이다. 이같이 사전오기의 새로운 신화가 창조됐다.
그는 이듬해 2월l일 일본에서「가사하타」와 1차 방어전을 벌여5차례나. 다운을 뺏고 판정승했다. 그러나 3개월 후인 5월7일 콜롬비아의 「리카르도·카르 도나」를 장충체육관으로 불러들여 2차 방어전을 가졌으나 12회1분23초만에 TKO패로 타이틀을 잃었다.
두 차례 방어전은 일본인 프러모터 「아라시따」의 옵션에 묶여 각각 3만 달러와 4만 달러의 적은 대전료를 받았다. 그리고 이 무렵 그는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에 빠져들었다. 천재는 재승덕박 박인가. 가수 옥희와 염문을 뿌리며 본부인과 이혼하는 등 지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얼마 후 조강지처에게 돌아갔다. 80년12월19일 홍수환은 염동균과 재기 전을 벌었으나 출전 끝에 무승부가 된 뒤 41승(14KO) 5패4무를 기록한 채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는 81년5월부터 WBC슈퍼플라이급 챔피언인 김철호의 트레이너로 다시 링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이마저 올 들어 마찰을 빚은 끝에 그만두었다. 자신이 직접 체육관을 운영하며 세계챔피언을 육성하는 것이 꿈이라는 이 복싱천재는 과연 언제쯤 다시 활활 타오를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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