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걱정하는 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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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어른바 장 여인 어음사기사건으로 빚어진 민심 혼란을 정치적 차원에서 풀기 위해 열린 16일의 청와대 3당 대표자회담은 나라를 걱정하는 공통의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유익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눈 것으로 평가된다.
국민의 비상한 관심이 쏠린 가운데 열린 이 회담에서 유치송 민한당 총재는 사건에 직접 책임이 있는 각료의 추가인책문제를 비롯해 정치활동 피 규제자의 해금, 구속 자 석방, 정치활성화,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반조성, 지방자치제의 단계적 실시 등을 제기했으며, 국민당의 김종철 총재는 국회 안에「정치발전특위」및「비상경제대책위」를 구성할 것과 「한탕주의」 의 척결 등 3개항을 건의했다.
민한·국민 등 야당 측의 이 같은 제의에 대해 전 대통령은 적절한. 시기에 인책개각을 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정치활동규제 해제에 대해서는 『개전의 정이 있는 사람은 적절한 시기에 단계적으로 해금시키도록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정치적인 현안문제에 관해 이 정도나마 언질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구체적인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대통령과 3당대표가 원탁을 마주하고 앉아 국정전반에 걸쳐 의견을 나눈 대화스타일이다.
야당당수가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의견을 30분 이상 개진한 것도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5공화국 출범이후 이와 비슷한 성격의 회담은 두 차례 있었고, 과거에도 몇 차례 영수회담이 열린 적이 있었다 이제까지의 영수회담이 의례적인 성격에 그쳤거나 회담 후에는 으레 적쟎은 후유증이 생겼던데 비해 이번 청와대 회담은 그런 잡음이 일지 않게 공개되었다. 새로운 대화정치의 패턴을 제시한 셈이다.
민주정치란 결국은 대화정치일 수밖에 없다. 오늘의 다원화한 이해집단이나 계층간의 갈등이나 이해상충은 대화를 통해서만 조정되고 해소될 수 있기 대문이다.
물론 정치적인 현안이나 계층간의 이해상충 등 모든 문제가 영수 급 회담에까지 올라가서 논의된다는 것은 적어도 정상적인 정치 행태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 나라처럼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 권력구조에서 각 계층의 민의를 수렴해서 이를 여과하고 조정하는 기능은 당연히 국회에 돌아가는데도 장 여인 사건이 터진 후 열린 국회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 했다.
사태해결의 부담이 청와대 정당대표회담으로 미루어진 것은 의회기능의 정상화가 왜 필요한지를 가리키고 있다.
전 대통령은 야당이 제기한 정치활성화 문제에 관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국회에서 자주 만나 이야기하고 우리끼리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고 말함으로써 고차원적인 대화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만나서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전 대통령이 이 같은 회담을 수시로 가짐으로써 어려운 국면을 헤쳐 나가자고 한 건의에 동의한 것은 그런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번 청와대회담으로 어음사기 사건이 몰고 온 엄청난 파동을 수습하는 실마리가 모두 풀린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회담은 사태를 구체적으로 풀어가기 위한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있을 이철희 장영자 부부를 비롯한 사건연루자들에 대한 형사소추를 통해 사건에 대한 일반의 의혹을 시원하게 풀어 주어야하고 한편으로는 이들의 「한탕주의」로 이지러진 경제와 거래질서를 바로잡는 일이 정부가 해야할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누구나 지적한 바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국민에게 허탈감과 좌절감을 안겨준 것이 이번 사건이 던진 가장 심각한 해독임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요령이나 눈치로 출세하고 치부하고 영화를 누리는 일이 용인되고 성행하는 한 정의사회의 구현이란 현정부의 국정목표는 한낱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청와대 3당대표회담은 국가적인 난제를 정치적 이해를 초월해서 대화를 통해 진지하게 해결해보려는 하나의 전례를 제시한 것이다. 회담의 성과에 대한 평가는 입장이나 견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정치적 성격을 띤 회담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서둘러 평가하기란 실제로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고, 기대를 적게 갖던 사람에게는 조그만 일도 큰 것으로 보이는 등 평가의 기준 또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청와대 회담이 문제해결을 위한 최고통치자의 신념이 얼마나 단호하며 정당 대표들의 인식 또한 같음을 확인한 것만은 사실이다.
다만 이번 회담에서 사건본질이랄까, 지금과 같은 심각한 국면이 벌어지게 된 요인에 대한 논의가 좀 더 있어도 좋을 뻔했다.
검찰조차도 이 사건을 건국이래 최대의 사건이라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고위정치회담에서 사건의 본질을 진단하는 진정한 자세는 있을수록 덕이 된다.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만 효험 있는 처방이 나오게 마련인 것이다.
시인할 것은 시인하고, 고쳐나갈 것은 고쳐나간다는 다짐이 있을 때 충격으로 얼룩진 국민들의 가슴은 다소나마 진정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결의가 있어야만 이와 비슷한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될 수 있다.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상처가 아무는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부가 아무리 성의와 노력을 다해서 사태수습을 한다해도 모든 국민을 충분히 납득시키기는 어려우리라는 생각도 든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사태의 빠른 치유를 위해서는 국민 모두의 인내가 뒷받침 되어야겠다.
지금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백 마디 미사려구가 아니라 한가지 실천임을 정부당국자는 명심해주기 바란다. 일시적인 미봉책이 아닌 정부측의 성의를 다한 노력만이 사태의 진정한 수습방안임을 다시금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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