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제자·철농 이기우>|바민특위(9)|국정의 본산「세종로1번지」34년…명멸했던 주역들은 증언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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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반민 특위와 맞 싸운 전위대는 수도청 산하 경찰. 암살음모까지 드러나는 험악한 대결이었다. 이른바 강경파 특위 위원 암살음모의 내용.
49년10월 하순 수도청 수사과장 실에 최난수 수사과장·홍택희 사찰과 부 과장, 그리고 최의 전임자인 노덕술 씨가 모였다. 이 자리에서 반민특위 멤버 중 강경파 의원을 제거하기로 합의했다. 경찰이 행동에 나섰다가 발각되면 곤란하니 전문 테러리스트에게 맡긴다는 방침 아래 지명된 인물이 백민태 씨(일명 임정화).
백 씨는 중국 배경에 있을 때 일본군 치안 시찰관 암살공작에 가담했고 풍대의 일본군영을 폭파했으며 북경의 광륙 극장 투탄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나흘 후 일본이 항복하게 돼 풀려났다. 광복 후 서울로 돌아온 백은 우익진영에 가담해 중도좌파이던 여운형 씨 집에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수도청 수사과장이던 노덕술 씨와 선이 닿았고 그 후 경찰의 정보 비를 보조받으며 정계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백은 반민 법을 공개적으로 성토하던 대한일보의 이종형 사장과는 가깝게 지내 경찰이 적임자로 판단한 것.

<명목은 좌익 제거>
그 며칠 후 최난수 수사과장은 약초 극장(현 스카라 극장)홍찬 사장 집에서 백을 불렀다. 노덕술 홍택희 박경림(전 중부서장)씨 등과 함께였다. 여기서 1차 타진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인 11월 17일 최 과장은 백을 수사과장 실로 불러 암살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반민특위 활동이 시작되면 정부 요로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저명인사가 해를 입게 되고 특히 빨갱이 소탕에 앞장서 경찰 간부도 피해를 보게 된다. 특위 위원 가운데는 좌익의 조종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김웅진 노일환 김장렬 의원이 극렬 파다. 당신은 이들 세 의원을 납치한 뒤 그들로부터「나는 국회 하기보다 이북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글을 쓰게 하여 이를 대통령, 그리고 신문사에 발송한다. 그런 38선의×지점까지 데려와 인계하라. 이것으로 당신 일은 끝난다. 그 다음은 경찰이 맡는다. 애국 청년이 그들을 살해하고「국회의원 3명이 조국을 배반하고 월북하려는 것을 적발해 사살했다」고 말하면 모든 깨끗이>
당시 서울지검 검사장이던 최대교씨(변호사)의 회고.『백민태는 3∼4대째 중국에서 살았다고 하는데도 우리 말을 잘했다. 18세 때쯤에 중국 국민당에 가담했고 중국「군통국려지사」라는 비밀결사의 지하공작대원으로 일본군에 대한 파괴 활동을 해봤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만났을 때의 인상은 키도 크지 않고 유순해 보여 전연 테러리스트 같지 않았다. 그런 그를 암살계획에 참여시킨 것은 당시 반민특위 위원 중 좌익이 있었고 경찰은 좌익을 처치한다는 명목으로 백을 포섭했다] 그런데 음모 2막은 아리송하게 빗나갔다. 백이 폭로한 내용<살인지령이 있은 며칠 뒤 누런 편지봉투에 잉크로 쓴 암살 대상자 명단이 보내져 왔다. 봉투 뒷면에는 수도청 공보 실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었고 수사과장이라고 15명의 명단 아래에「처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명단은 김병노 대법원장, 권승렬 검찰총장, 신익희·김상덕 김상돈 의원, 특별 재판관 서순영 오택관 홍순옥 최국현, 특별검찰관 서용길 서성달 곽상훈, 그리고 청년단체 관계자로 유진산 김두한 이철승 등 15명(이 인 씨 회고에는 이청천 의원·서용길 의원의 국회발언에 는 김준연 의원이 포함돼 있다).
그들은 암살공작금으로 30만 원을 주기로 했으며 1월8일 1차로 10만 원(현금 7만 원·박 모 씨 명의의 수표 3만원)을 건네주면서 권총 한 자루와 5개의 수류탄을 제공했다. 바로 이 음모 2막을 조헌영·김준연 의원이 국회에서 사전에 폭로했다.
이렇게 되자 경찰은 백을 의심하게 됐고 백은 혈서까지 써 보이며 나는 폭로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 1월25일 노덕술 씨가 체포되고 같은 날 최난수·홍택희 두 경찰간부도 체포되자 백은 29일 검찰에 자진 출두해 암살 모의를 고발했다. 그는 사건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검찰에 보호 감금되었으며 2월12일 관계된 세 경관이 기소된 뒤 풀려났다.
이 사건에 대한 증언.·당시 서울지검 장 최대교씨『하루는 김준연 의원이 찾아와 백민태가 그러는 데 좌익들의 요인 제거대상자 명단이 마포 경찰서에 입수됐다는데 그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함께 가자고 해 따라 나셨다.

<암살 대상자 15명>
그런데 마포 서에서는 최운하 수도청 사찰과장이 가져갔다고 했다.
다시 최 과장에게 갔더니 김태선 수도청장에게 주었다고 해 김 청장에게 갔더니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명단은 거기 두고 왔다고 했다.
그러다 얼마 뒤 백민태가 사건을 폭로해 관계자들이 검찰에 체포됐다. 그 때인데 김태선 수도청장이 나를 찾아와 미군들이 지프를 폐차하는데 그 작업을 우리가 맡기로 됐다. 그 중에는 쓸 수 있는 좋은 차도 많다. 그 중 한 대를 손질해 보낼 테니 타도록 하라. 그러면서 간접적으로 암살사건 관련자의 구명운동을 했다. 당시 지프 1대는 10만원 정도였는데 나뿐만 아니고 다른 검사들에게도 지프를 주겠다면서 청탁을 했다.』
제헌의원이던 장홍염씨『내가 중국에 있을 때 한족 연합회 청년부장을 맡아 독립투사들은 대부분 기억하나 백은 들은 일이 없다. 아마 이종형 밑에서 대동단 인가를 조직해 반민특위 반대투쟁을 해 온 김우정의 부하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당시 알려진 바로는 백은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민족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줄이 닿아 있었다. 그런데 최 과장 등의 암살 지경엔 그가 존경하던 인물이 끼여 있어 이를 폭로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선 암살 자 15명의 명단은 경찰이 작성한 것일 수 없다. 제1막은 경찰계획일지 몰라도 2막은 정치적으로 조작된 흔적이 있다고 했다 .아무튼 1심에서 최난수·홍택희는 살인 예비 등 죄로 징역 2년이 선고되고 노·박 두 사람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
지방에서도 암살기도가 있었다. 반민특위 강원도지부 김우종 조사부장은 신변보호를 위해 호위 형사로 김영택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3월28일 하오 5시쯤 김 형사 오발로 김 부장은 부상을 당했다. 애초 이 사건은 단순 오발로 처리했다. 그러나 은밀한 조사결과 암살 지령 문이 발견돼 오발을 가장한 살인음모였음이 밝혀진 것.
사건 내막은 당시 반민 법 해당자로 은신해 있던 장 모 씨의 주변 인물이 김 형사에게 접근해 <특위 위원들은 사상이 불순하다. 대통령이 특위를 못마땅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선동, 포섭한 뒤 김 조사부장 살해 지령을 한 것. 이 지령 문은 읽은 후 불태우라고 했는데 김 형사가 숨겨 두고 있다 발견돼 쇠고랑을 찼다.
경찰은 합법적인 투쟁도 했다. 수도경찰청 최운하 정보과장이 중심이 되어 행한 반민특위 멤버들의 신상조사도 그 하나.
신상조사 결과 특위부 위원장 김상돈 의원이 마포구의 서교동·망원동 지역의 총대(현재의 동장 격)를 했고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 보급소장이었던 경력을 찾아냈다. 경찰은 이를 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곧바로 신익희 국회의장과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불러 이런 사실을 제시하면서 친일파 처벌은 공평해야 한다는 의견을 말했다. 3월19일 국회 본회의에서 박 준 의원은 김상돈 의원의 친일행위를 폭로, 반민특위 부위원장 직에서 해임할 것을 제안했다. 이 문제를 싸고 국회는 격론을 벌였다. 당사자인 김 의원은<총대 직은 부락민의 투표에 의해 선출됐으며 나는 일본인과 합법적인 투쟁을 한 애국자>라고 스스로를 강변했다.

<특위서 이탈 속출>
결국 표결에 붙여졌는데 많은 의원들이 기권해 해임 안은 미결로 폐기되고 말았다.
이 무렵 국회엔 김상돈 의원 외에도 7∼8명의 국회의원이 반민 법 해당자라는 투서가 들어와 있었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은<국회에 보내져 온 투서나 문서조사에 의하면 국회 안에도 반민 법 해당자가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리하여 3월초부터 3주간에 걸쳐 국회자격 심사위원회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이 인 씨의 회고.『국회에서도 10명이나 혐의자가 있었다. 국회 부의장 김동원을 비롯하여 진헌식 이종린 한암회 등 천명의 동료 의원들을 조사를 안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사 결과「국회에는 반민 법 5조 해당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반민 법 5조는「고등 관 3등급 이상의 관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 경찰의 직에 있던 자는 본 법의 시효 경과 전에는 공직에 임명 될 수 없다」는 조항. 국회의 이 같은 조사 결과가 나오자 김약수 부의장은 반민특위를 방문해 친일파 의원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부의장은『국회 안에는 상당수의 해당자가 있는데도 5조 해당자가 없다고 하는데 반민 법은 5조로만 된 것은 아니 잖은 가. 반민특위에서 국회 내부 숙청을 맡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국회의 권위를 지켜 가야 한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는 하지 않았다.
국회의 이 같은 자가당착, 정부의 공세 속에서 국회 안에도 대립이 커져 갔다.
특위 재판관 김장렬 홍순옥 의원 등은『특위 활동이 입법정신에 위배되고 법의 운영에 보조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의를 표명했다.
재판관인 최국현 의원도『특위는 가장 무능한 사람만 붙들고, 어떤 단체나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잡을 수가 없다. 현재 경관 가운데 가장 불량분자가 있으나 체포하지 않고 있다 .군대에 들어간 사람도 붙들어 오지 못한다』고 통박했다.
제헌 의원 김인식 씨『일제의 앞잡이들이 재력과 행정적 능력 등을 모두 가진 속에서 특위의 활동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선우종원씨『해방 후 친일파 처단이 두려운 상당수의 일제 때 경찰들이 군으로 도피해 헌병에 몸을 담았다.』
장홍염씨『반민 법 해당자들이 군으로 많이 피해 갔으나 군이 무서워 목 위에서도 건드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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